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다니던 두 곳 학교는 집에서 차로 각각 35분, 4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퇴근 시간에는 상습 정체 구간을 지나야 해서 집에 도착하는데 한 시간 이상 걸리는 날도 많았다.
작년 첫눈이 폭설로 변하여 재난 상황이 되었던 날에는 퇴근하는데 두 시간 반이 걸렸다. 그날 내 인내심은 한도 초과가 되었다.
이틀 후부터 나는 집에서 30분 이내 거리에 있는 어학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교에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어학원의 구인 공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담당자에게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주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문자를 받고서 바로 서류를 메일로 보냈다. 30분 후 문자를 주고받은 번호와 다른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 보니 학원 원장으로 보이는 사람의 전화였다. 빠른 시일 내에 면접을 보자고 하면서, 문법 시강 한 가지와 막 파닉스를 뗀 학생들을 위한 회화 시강을 준비해 오라고 했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면서 시강 준비를 했다. 회화시강은 9가지 날씨 이미지를 구글에서 인쇄하여 날씨에 관한 짧은 회화를 구성해 봤다. 먼저 9가지 날씨 이미지 단어를 두 번씩 읽되, 두 번째 읽을 때는 몸동작과 표정으로 날씨를 표현했다. 그러고 나서 3가지 날씨 표현을 이용해 "How's the weather today?" 문장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문법 수업 주제는 현재 시제와 현재 진행형 시제를 비교하는 것으로 정하고, 구글 이미지를 인쇄했다. 냉장고에 프린트물을 자석으로 고정시키고 나 혼자 리허설을 하면서 '이거 꽤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12월 중순 면접일이 되었다. 회화 시강을 먼저 보여주는데 원장이 웃으면서 "Repeat after me"라는 내 말에 문장을 따라 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회화 시강이 끝나고 문법 시강을 하려는데, 원장이 동영상 촬영을 하게 해달라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교수부장과 영상을 보면서 상의를 하려고 한다고 해서, 영상 촬영을 허락했다. 문법 시강을 촬영하고 나서, 촬영을 위해서 회화 시강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시강이 끝나고 원장실로 이동해 내 이력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았고,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고 하길래 1/17에 마지막 수업이 있어서 그 이후에 가능하다고 했다. 원장은 1월부터 새롭게 반이 편성되어 수업이 시작되는데 그게 걸린다고 하면서, 학교는 대체강사를 구해서 수업을 끝내게 하라고 권유를 했다. 나는 마지막 한 달을 남겨놓고 대체강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원장은 다음 주에 면접자가 두 명이 더 있으니, 그 이후에 최종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일주일이 지났다. 연락이 없었다. ‘아 그때 바로 일 할 수 있다고 했어야 했나?’하는 후회가 되었다. 주말이 지나고 그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원장이 문자를 보내왔다. ‘고심 끝에 다른 사람을 뽑기로 했다면서, 면접 때 인상적이었다면서 나중에 다른 기회에 보자‘는 불합격 통지였다. 실망감과 함께 ‘내 초상권은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틈틈이 잡코리아와 알바몬을 검색해 왔다. 엊그제 한 군데 서류를 낸 곳에서 당일에 면접을 보자고 전화가 왔다. 가서 얘기를 들어보니 여기도 프랜차이즈이긴 한데, 학원이라기보다는 본사 프로그램과 교재를 사용하는 공부방에 더 가까웠다. 원장은 나보고 M영어 학원을 그냥 차리라고 했다. 창업 비용은 보통 2000-3000이 든다고 했다. 카페 창업할 때 드는 비용과 비교해 보니, 하이엔드 에스프레소 머신 한 대값 정도밖에 안되었다. 얄팍한 귀를 가진 나는 귀가 팔랑거렸다. 그래도 뭔가를 하려면 직원으로 먼저 일해봐야 한다는 내 나름의 원칙이 있기에, 일 해보고 결정하겠으니 연락 주시라고 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이 원장은 처음부터 나를 고용하기보다는 창업을 하게 해서 본사에서 커미션을 받아 볼 생각이었나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그래도 이곳저곳에서 면접까지는 볼 수 있게 되니 나름 자존감이 올라가면서 ‘나 아직 안 죽었다-’라는 생각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번주 목요일에 분당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방과후업체의 실무 이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안해하는 목소리가 왠지 좋은 소식이 아닐 것 같았다. 기존 학교들 모두 입찰에 성공했는데, 원어민 영어 하는 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이 한국인 영어강사를 교체해 달라고 했다고 했다. 또 다른 학교에서는 부장선생님이 학습 위주 수업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놀이영어로 바꿔달라고 하면서, 교재와 강사를 싹 바꾸라고 했다고 했다.
두 학교들 다 학부모들 피드백도 좋아서 올해는 수강생이 더 늘 거라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나는 교장선생님의 강사 교체 이유를 물어봤다. 실무 이사는 교장선생님 말씀이라 이유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목, 금, 토..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속이 무척 상했다. 경단녀를 벗어나서 이제 겨우 3년 일했는데..이제 학교에 방과후강사 이력서 내면서 면접 보러 다니는 것도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오전에 우리 아파트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는 초등 대상 영어학원 공고를 발견했다. 이곳은 오전에는 영어유치원을 운영하는 곳으로, 딸아이 어렸을 때 보냈던 학원이다. 월, 수, 금 오후.파트타임 지원자라고 하면서, 담당자에게 이메일 주소를 보내달라고 하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오후에 연락이 왔는데, 다음 주 월요일에 면접을 보자고 했다. 파닉스 시강 하나와 문법 시강 하나를 준비해 오라고 했다. 시강은 15분이고, 시강 포함 면접 시간은 한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하~ 내 멘탈이 얼마나 털릴려고 면접을 한 시간이나 본다고 하나..’
오늘 방에서 시강 리허설을 하면서 든 생각은 이곳 까지만 면접을 보고,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스와 골프 연습장이나 등록해서 체육인으로 거듭나야겠다는 회피성 계획을 세워본다. 이렇게라도 회피하지 않으면 정면으로 펀치를 맞을 것 같기 때문이다.
퇴.출.펀치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