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모르는 고독감이 눈에 아른거렸다.
9시에 일어났다. 긴장감과 시차 탓인 듯하다. 커튼 사이로 얇은 회색빛이 비집고 들어온다. 무의식적으로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자 흐릿한 하늘과 불 켜진 창문들이 눈에 띈다.
공짜 시간이 생긴 아침, 나는 내 방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내 방은 3평에서 5평 정도의 크기다. 거울을 겸용하는 옷장, 의자 두 개, 책상, 쓸만한 냉장고, 세면대가 있었다. 나름 있을 것들은 다 있고, 침대도 큼지막했다. 공간 자체는 좁지만 홀로인 영혼에게는 한없이 넓다. 멋모르는 고독감이 눈에 아른거렸다.
찬 공기로 숨을 쉬고 싶었다. 창문을 열었다. 낡은 철제 프레임의 유리문을 낑낑대며 열고, 무거운 철제 유리창 덮개(?)를 접어 열었다. 무척이나 이국적인 풍경. 어젯밤의 비에 젖은 도로, 잿빛의 하늘, 베이지색 석재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회색빛을 한가득 머금은 하늘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서안 해양성 기후를 처음 보냐, 는 듯이..
열린 창문과 함께 찬바람이 들어온다. 흐리기만 한 하늘에서라도 조금의 태양빛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인간이 참 단순하다. 어젯밤 너무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나 하는 생각도 하면서 현실적인 고민들을 다시 하게 된다. 오늘 어디에 갈까? 내 집 근처는 어떤 모양일까? 어떤 가게들이 있을까? 먹을 만한 음식점도 몇 개 알아놓아야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어제 집주인분이 소파로 접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떠올랐다. 호기심에 침대를 접었다 폈다 했다. 잘 접어서 소파가 된 줄 알았던 순간, 침대받침의 나무 일부분이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손을 넣어 이리저리 움직여 제자리에 맞추어 넣고, 이걸 소파로 쓸 일은 다시 없겠구나 생각했다. 책상에 가서 어제 기내식으로 받고 남겨둔 머핀과 빵 조각들을 접시에 올렸다. 빵 조각들을 포크로 찍어 먹기 시작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나는 내 방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을 이 에어비앤비 방을 내 집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우선 가져온 책들을 책상 한구석에 꽂아 넣는다. 그 다음 한 달 동안 홀짝홀짝 마실 생각을 하며 면세점에서 산 술병으로 넘어지지 않게 막는다. 나름 괜찮은 책상 느낌이 난다. 파리 16구에 한국어로 된 책이 몇 권이나 있을지 상상해 봤다. 흔하디흔한 책표지의 한국어가 내 정체성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그리고는 가방과 캐리어에서 꺼낸 물건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남는 의자에 가방을 두고, 간단한 노트와 펜을 책상 가운데에 올려 두었다. 무선 키보드도 한구석에 눕혀 놓았다. 매일 가지고 다닐 물건들은 책상 한쪽에 고이 모셨다. 그렇게 내가 살 방이 완성되었다.
나중에야 적는 내용이지만, 한 달 동안 이 물건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머나먼 타지에서 내 물건들에게 받는 위로는 컸다. 어릴 때 선물받아 지구 반대편까지 가져온 가방, 항상 쓰던 펜과 노트, 친구가 생일 선물로 준 무선 키보드, 고등학교 때 사서 아직까지 차는 시계... 나의 일부분이 물건의 형태로 보존되는 느낌이다. 몇몇 물건들이 내가 나라는 연속성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또 실내에서 무엇을 신을지에 관해서다. 방에서 문을 열면 바로 복도다. 한국인인 나는 집안에서 신발을 신는다는 개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바닥을 한번 대충 닦은 뒤 방 안에서는 천 슬리퍼를 신기로 했다. 문 열리는 범위에서 한 걸음까지만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규칙을 정했다.
9시 50분에 맞춰 둔 알람이 울렸다. 집주인분을 만나 동네 투어를 갈 시간이다.
남은 한 달은 어떻게 보내게 될까?
재미있을 것 같다. 이것저것 음식도 만들어 먹고, 빵도 많이 먹고, 아침에 책 보면서 커피도 마시고...
밤에 창밖을 바라보며 술도 한 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