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글 쓰기 위한 시간과 공간은 따로 존재하는가
꼭 시월부터 글쓰기를 멈추어야지라고 다짐하지도 않았지만
꼭 이달 첫날부터 다시 글쓰기를 시작해야지라고도 마음먹지 않았다.
글 쓰는 것도 특별한 동기 없이 자연스러웠고
글을 쓰지 않는 것도 어떤 이유 없이 자연스러웠다.
이 백 여일을 쉼 없이 매일 쓴 글이었기에
글쓰기는 일상의 루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속적인 글쓰기를 보장하지 않는다.
글 쓰는 동안의 시간보다 글 쓰지 않는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갔다.
글 쓸 때가 글 쓰지 않을 때보다 바빴는데
글 쓰지 않는 동안에는 시간이 나도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글을 쓰고 못 쓰게 하는 것은 여유의 시간도 아니었고 안정된 공간도 아니었다.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의 스위치를 켜지 않으니
당최 쓸 시간도 나지 않았고 쓸 공간도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동안 내가 글을 쓰며 보낸 시간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동안 내가 글을 쓰며 지낸 공간들은 어디에 있는가.
슬픈 날에 쓰지 않으니 힘겨웠고
힘겨운 날에 쓰지 않으니 슬펐다
그동안 미뤄둔 일들로 많이 바빴고 너무 서두른 일들로 많이 어수선했다.
망망대해에서 폭풍우를 맞은 어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기잡이를 멈추고 잡아둔 고기도 버려야 한다.
가장 가벼운 몸으로 견뎌야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내게는 고기잡기가 글쓰기였고 잡아둔 고기들이 글 쓰는 생각들이었다.
한 달이 지나 생각해보니 착각이었다.
글 쓰는 생각은 내가 탄 배였으며
글쓰기는 배를 나아가게 하는 노였던 것이다.
그나마 완벽하게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에 온통 상처투성이지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노가 없는 배가 되어 바다 위에서 목적지를 잃을 채 떠 있다.
다시 글을 쓴다는 건 내게 배를 나아가게 할 노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일 게다.
좌우로 번갈아가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일정한 톤으로 글을 써야 할 것이다.
반드시 고기 잡는 배가 다시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유람하는 배가 되어도 좋다.
이미 배로 태어났으니 바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다.
배는 떠 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뭍에서 뭍으로 건너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잘 건너간다는 것은 나를 극복하는 일이 된다.
여기에만 안주하지 않는 삶.
저곳으로 넘어가려는 의지.
글을 쓰지 않고 제대로 건너간 자는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이제 다시 건널 시간이 내게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