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꿈
어린 시절에는 글을 쓰는 사람, 그러니까 ‘작가’라는 것이 유일하고도 근원적인 꿈이었다. 아마도 소설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짓는 것이 나의 업이자 소명이라고 느끼곤 했다. 그것은 매우 막연하지만 선명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그려지곤 했다. 나무가 우거진 숲속의 집, 그 근거리에서 나는 언제나 서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있을지 모르는 어떤 원석, 재능을 갈고닦기보다는 묘연해 보이는 ‘생업’을 좇아 길들여지는 중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입시에 몰두했고, 조금 더 현실적인 직업이나 일자리를 얻기 위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스스로를 적응시켜 나갔다. 시스템 안에 내던져진 것은 불가항력적이라 해도, 곁길이 원천봉쇄된 것도 아니었건만. 나는 그 길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다.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좀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어떤 길만을 ‘걸을만한 길’이라 여겼고, 그곳으로 행로를 정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엔 그 ‘좀 더 현실적’이라 믿었던 길이 ‘완전한 허구’였음을 깨달았다. 당시 조금은 나의 현실에 분노했던 것 같다. 수만 개의 현실이 있었지만, 어떤 현실도 나와 들어맞지 않는 것뿐이었다. 대기업도, 공무원 시험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떤 군단에 다시 들어가 열과 행을 맞춰 높은 곳에 선 자를 보며 손뼉 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언제라도 빠져나올 수 있는 곳들을 전전하며 잃어버렸던 나의 ‘곁길’을 찾아 헤매곤 했다. 아니, 곁길만을 찾아 헤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주위를 돌아보니 언젠가 밟아보려던 그 길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어떤 길이었더라…. 무작정 길을 걷고 있던 나 자신마저 낯설었다. 무엇을 위해 그 긴 시간, 어떤 틀에 부합하기 위해 나의 형태마저 잃어버린 걸까.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나의 인생도 객지에서 스러져갈지 모른다. 곁길의 곁길만을 맴돌다가 종국에는 무엇이 곁길이고, 무엇이 나의 길인지도 헷갈리게 되었다. 확실한 것은 숨이 붙어있는 한은 어떤 길 위에 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 지금은 이 길 위에 있구나’ 하는 자각만이 남았다.
소설가가 되기에는 지극히 ‘균형을 지향하는 삶’을 살고 있다. 건사해야 할 어린 육신과 영혼이 나와 함께 한다. 그것만이 지금의 내게는 몸에 새겨진 무늬처럼 확실한 진실이자, 행선지이다. 어쩌면 지금은 길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잠시 멈추고, 어떤 터에 뿌리내린 나무가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멈춰 서서 하늘과 땅 사이에 자라나는 풀떼기를 보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언젠가 다시 근원적인 모습으로 길을 떠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멈춰 서 있다. 그리고 그 멈춘 자리에서 이렇게 짧게, 한 페이지의 글을 쓴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해. 대신 애써서 해.”
어느 할머니의 말처럼,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