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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윤 May 22. 2023

어떤 사랑은 우정같고 어떤 우정은 사랑같다

나는 친구가 하나 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어떤 사랑은 우정같고 어떤 우정은 사랑같다.
<쇼코의 미소>


나는 친구가 하나 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이다.


-들어 봐. 얼마 전에 우리 학교 축제였잖아.

-응. 그랬지.

-근데 거기서 우리 과 애들을 다 같이 볼 일이 있었는데, 거기 완전 잘생긴 남자애가 있는거야. 들어보니까 1학년이래.

-오, 잘생겼어? 번호 물어보지.

-솔직히 그러고 싶긴 했는데, 어떻게 그래. 아니 근데 나중에 들은 건데, 걔 옆에 있던 내 친구가 날 보고 '저 여자 개이쁘다' 라고 했다는 걸 들었다는 거야. 그러더니 나한테 나중에 레모네이드를 주더라고.

-그래서? 받았어?

-받았지. 너무 귀여운 거야. 이런 애면 연하도 좋지 않아?


이러한 이야기로 시작된 내 친구와 그 남자애의 연애는 몇 년째 나쁘지 않은 기류를 타는 중이다. 별 일이 없다면야, 아마 결혼을 하지 않을까?


기분이 이상했다. 더 이상 우리는 서로의 첫 번째가 아니다. 생일을 가장 먼저 축하해 줄 사람도 아니고, 여행을 가더라도 당연히 같이 갈 사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랑 그 애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만큼은 아닌 게 당연하다.


그렇다고 썩 섭섭하다거나 한 건 아니다. 사실, 예전같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 애의 세상이 넓어지는 걸 인정하기 어렵던 시절. 우리는 중학교를 같이 나왔고,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갔다. 나의 세상도 넓어졌고, 아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리고 그건 당연하게도 그 애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대학을 가고, 지역이 멀어졌다. 나는 서울로, 그 애는 전주로. 서로의 세상은 점점 커졌다. 교집합은 점점 작아졌다.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를 일반적인 세상의 카테고리와는 다른 곳에 분류해 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사람' 카테고리에 몇 명이 들어오더라도 서로의 카테고리는 흐려지지 않는다. 우리의 카테고리는 이름으로 저장된 고유명사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어떤 친구가 생기고, 어떤 활동을 한다는 것에 순수하게 축하할 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열일곱부터 여행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했을 때에는 스무번의 여행을 하고도 남은 상태였다. 3번 경유하는 백 만원짜리 티켓을 미쳐서 끊어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굳이 경유지인 헝가리 공기 마셔보겠다고 뜀박질을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같이 클럽에 가기도 하고, 거기서 만난 잘생긴 남자를 이야기하고. 어느 날은 그냥 동네에서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서 몇 시간씩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만화카페에 가서 서로의 취향을 뜯어보기도 했다.


세월을 공유한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 요즘 많이 쓰이는 노션을 써서 다이어리를 정리하다가, 몇 달만에 포기하고 아날로그 다이어리를 다시 샀다. 그 애랑 만날 약속을 다이어리에 적는데, 획수가 너무 익숙해서 스스로도 놀랐다. 어떻게 써야 가장 예쁘게 글씨가 써지는 지 손이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글자를 써서 다른 글자는 삐뚤빼뚤 난리가 났는데, 그 애 이름만큼은 정자로 예쁘게 적혀 있었다. 그만큼 내가 이 이름을 많이 썼다는 뜻이겠지. 이름이 손에 배인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만날 약속을 몇 백번이고 다이어리에 적었을 테니까.

 

왜 첫사랑으로 만난 연인이 헤어질 때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런 10대와 20대를 같이 보낸 친구는 여느 인간관계와는 다른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 말하자면 우리는 특별한 친구이다.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 나는 <쇼코의 미소>라는 책을 읽었다. 읽고 싶어서 읽은 건 아니고, 백일장에 글을 내기 위해서 읽었던 책이다. 표지가 예뻐서 좋아했던가. 어쨌거나 나는 그 책을 여러번 읽었다. 그 책 속에 이런 말이 나온다.


어떤 사랑은 우정같고 어떤 우정은 사랑같다.


솔직히 문장은 완벽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읽은 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 책은 지금 본가에 있지, 내 6평짜리 자취방에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내용은 확실히 그런 내용이었다. 읽을 당시에는 별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해를 하게 됐다.


내 친구를 사랑하냐고? 당연히 사랑한다. 애인을 볼 때의 그런 사랑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프면 약 사다주고, 생일날에 갖고 싶어하던 가방 사주고, 편지 써주고, 그런걸 해도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감정을 또 뭐라고 해야 할까? 그건 일반적인 우정보다는 사랑에 조금 더 치우친 우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정은 사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통과점 같은 거다. 몇 가지 조건에 따라서 어디까지 감정이 발전하는가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우정이나 사랑은 갈림길에 있는 게 아니라, 한 고속도로 위에 놓인 다른 목적지일 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랑은 우정같기도 하고, 우정은 사랑같기도 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건 부르는 대로 불러지는 감정이다. 그러니까 굳이 둘을 째째하게 이분법지을 필요는 없다. 그냥 '서로가 서로의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만을 두면 다 설명될 일이다.


아마 내 친구는 이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해 본적은 없을 것이다. 그 애는 그렇게 섬세한 타입은 아니다. 언젠가는 내가 이런 공개적인 사이트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을 알면 기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도 그렇게까지 미래를 섬세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글을 쓴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첫번째는 아니지만, 여전히 가장 친한 친구이다. 결혼을 한다면 부케를 받는 사람이 될 것이고, 또 아이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엄마 친구로 소개될 것이다. 가끔 친구끼리 여행을 간다면 또 그때는 당연히 서로의 일정을 비울 것이고, 누군가에게 친구를 소개한다면 제일 먼저 이름이 생각나는 친구.


독자도 이런 친구가 있는가? 모르긴 몰라도 다들 많은 또 다른 우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각자의 그 애를 생각해보는 밤이 되기를.

어떤 사랑은 우정같고 어떤 우정은 사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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