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보낸 스무 살의 주말은 파티로 시작되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캠퍼스 곳곳에서 음악이 울리고, 맥주 캔이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의 “오늘 한 번 신나게 마셔보자!”와는 달랐다. 미국의 파티는 네트워킹의 장이었다. 가벼운 스몰토크 속에서 얄팍한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문화. 한국의 깊은 정에 길들여진 나는 처음엔 그들의 “겉만 반갑다”는 태도가 어색하고 심지어 싫었다. 하지만 살다 보니 어느새 나도 맥주 한 캔 들고 “Hey, how’s it going?” 하며 그 흐름에 녹아들었다.
영어를 잘 못할 때는 스몰토크가 고역이었다. “날씨 좋네”를 넘어서는 대화가 어려워 어색한 미소만 짓곤 했다. 하지만 영어가 조금씩 늘자, 그 가벼운 대화도 나름의 재미를 찾았다. 지금은 혼자만의 주말이 간절하지만, 그땐 혼자 쉬는 주말이 심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어떻게든 친구를 사귀고,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날도 캠퍼스 파티를 기웃거리던 내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지난번 파티에서 만난 말레이시아 화교계 미국인, 긴 생머리에 웃음이 매력적인 그녀였다. 동양 문화권이라 친근했고, 그녀의 한국인 남자친구 Han 덕에 나도 그녀를 알게 됐다. 우리 학교엔 한국인이 드물어 다들 서로 누군지 알았다. 그녀와 더 친해지고 싶었다. 맥주를 들고 씩씩하게 다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Don’t you know me?”
순간, 그녀와 주변 친구들의 눈빛이 멈췄다. 당황한 얼굴들. 어색한 정적. 나는 얼떨결에 이어갔다. “나 Han의 친구잖아! 저번에 인사했는데? 여기서 보니까 반갑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아, 그래, 반갑다”고 했지만, 눈빛은 분명 “쟤 뭐야?”였다.
파티는 계속됐지만, 그 순간의 어색함은 내 머릿속에 남았다. 며칠 뒤, Han이 점심을 먹다 툭 내뱉었다. “야, 너 그때 파티에서 뭐 한 거야? ‘Don’t you know me?’라니, 그건 ‘너 나도 몰라?’ 하면서 따지는 뉘앙스야.”
그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내가 던진 그 말은 반가운 인사가 아니라, 마치 “너 나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투로 들렸던 거다. 한국어로 치면 “나 모르는 거야?”라며 살짝 윽박지르는 느낌. 웃음이 터졌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또 한 번, “일상회화 정복!” 책의 함정에 빠진 순간이었다. 그 책 저자님, 아마 미국 파티 한 번 안 가본 게 분명하다.
그 사건은 내게 미국 파티 문화와 영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Haven’t we met before?”나 “Hey, good to see you again!” 같은 표현이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웠을 터. 말 한마디가 사람을 연결하거나, 어색한 벽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걸 그 파티의 맥주 향 속에서 배웠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그녀는 그 뒤로 나를 볼 때마다 살짝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마 내 무모한 인사를 기억했을 거다. 스무 살의 나는 틀려도 부끄럽지 않았고, 오해도 웃음으로 넘겼다. 그 시행착오가 내 영어를, 그리고 나를 더 단단히 만들었다. 이제는 파티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부드럽게 말한다. “Hey, I think we met before!” 그리고 속으로 살짝 웃는다. “…definitely not ‘Don’t you know me?’ thoug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