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ggage vs Baggage: 내 마음의 짐?

by 재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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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우리는 기숙사 라운지에 모여 앉아 인생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 연애 이야기를 꺼냈고, 자연스럽게 과거 연애에 대한 얘기로 흘러갔다.

Sarah는 최근 새로 만난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나도 Sarah가 남친과 같이 있는걸 몇 번 보았는데 그다지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호감형 얼굴을 가진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친구였다.

"He's really great, you know? No drama, no emotional baggage from his ex. It's so refreshing! (너무 멋져,알지? 감정기복도 없고 전 여자친구에게 나쁜 기억 같은 것도 없고, 너무 신선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때 Michael이 나를 보며 물었다.

"What about you, Jamini? You seeing anyone? Didn't I see you with some handsome guy? Are you two dating? (넌 어때? 재미나이? 너 요즘 사귀는 사람 있어?너 저번에 보니까 잘생긴 남친 생겼던데...맞지?)"


그당시 나는 미국땅에서 참으로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친척이 있기는 했지만 비행기로 2시간을 가야하는 거리에 살고 있었고 여기서 만난 친구는 딱히 한국 친구처럼 깊은 정이 가지 않았다. 당시에 내 주변에는 결혼하고 온 대학원 선배들도 있었는데 그 선배 가족들을 따라 주말에 여행을 가는게 그당시 내 유일한 낙이었다. 조그맣고 뚱뚱한 동양인 여자애를 만나줄 인자한 미국남자를 찾기는 매우 어려웠다. 아니면 내가 적극적이지 않은건지도 모른다. 그러던 나에게 함께 중간중간 인사를 하던 태국 부잣집(?) 도련님이 있었다. 키는 크지 않고 영어도 서툴렀지만 나만 보면 "안녕 재미나이...?"하며 얼굴이 빨개져서 인사하는 귀여운 도련님 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태국에서 지위가 아주 높은 군인인데 소유한 쇼핑몰만 10개가 넘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같은 문화권에서 오기도 했고 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기 때문에 그 도련님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태국도련님은 말그대로 나에게 찐부자란 이런거다를 보여줬다. 나는 기숙사에서 용돈을 아껴가며 사는데 도련님은 넓은 아파트 하나를 혼자 렌트해서 쓰면서 재즈를 즐겼고 미국에 오자마자 레인지로버를 사서 내가 가끔 피곤하거나 지칠때 드라이브를 제안해줬다. 나는 속으로 "나 이러다가 태국재벌 되는거 아니야?" 하며 혼자 북과 장구를 번갈아 치며 신이나서 그와 자주 데이트를 즐겼다.

하지만 그와 만날때마다 그는 항상 나에게 자신이 만난 백인여자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상담을 하려고 했다. 그의 취향은 꽤 확고했는데 분명한 것은 그 취향은 나와는 정반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가 관심있는 여자들의 속마음을 알려주는 혹은 자신의 어설픈 영어를 마음껏 드리밀어도 창피하지 않은 그런 남성(?)같은 여사친 이었던 것이다. 사실을 알게된 후에 나는 약간 씁쓸했지만 찐부자 도련님이 연애상담을 할때마다 데리고 가는 비싼 식당과 분위기에 취해 그냥 모르는척 그의 고민을 들어주며 영어과외교사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친구들 앞에서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걸 말하는건 너무 부끄러웠다.

"Yeah, he seemed nice but... he had a lot of emotional baggage.(응, 좋은데....과거의...감정적인 짐이 너무 많아...)"

그런데 'baggage'라는 단어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났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그 순간, 나는 아는 단어를 급하게 꺼냈다.

"He had too much... emotional luggage.(걔는 너무 많은 감정적인 여행가방을 가지고 있어)"

순간 모두가 멈췄다. 친구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웃음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Emotional... luggage?" Kevin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응, 그러니까... 과거의 짐? 트라우마? 그런 거..."

"Luggage? Like... 캐리어?" Sarah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So he's carrying around empty suitcases full of feelings?(그러니까 감정으로 가득찬 빈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는거지?)" Michael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감정적인 캐리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친구들은 이미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Maybe he needs a luggage cart for all those feelings!(감정용 짐 싣는 카트 하나 필요하겠는데?"

"Does he check them at the airport?(공항에서 짐은 부쳤고?)"

"Emotional overhead compartment!(감정 수하물 보관함이라니!)"

나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소리쳤다.

"아! Baggage! I meant baggage! Emotional BAGGAGE!"

그날 밤 나는 'emotional luggage girl'이 되어버렸고, 그 별명은 한 학기 내내 따라다녔다. 지금도 가끔 친구들이 만나면 "How's your emotional luggage doing?(너 감정 담는 가방 잘가지고 있어?)"이라고 놀린다.

그 후로 나는 절대 잊지 않는다. 마음의 짐은 luggage가 아니라 baggage라는 것을.

사실 luggage는 짐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여행가방, 캐리어를 가리킨다. 하지만 baggage는 꼭 짐이 안에 들어있어야 baggage가 된다, 그래서 과거의 "짐"이 많다고 할 때는 baggage라고 하는게 옳은 표현이다.

화,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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