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CALLAN 12 Years Old

잔상노트 001

by vonbrillo
한 잔의 위스키와 떠오르는 생각을 담은 노트


조용히, 천천히 마실 수 있어서,

이게 내가 위스키를 좋아하는 이유다.


위스키는 시간을 조용하게 그리고 느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퇴근 후 북적이는 지하철을 탄다.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밀어 넣었던 몸을 꺼내어 아무도 없는 나의 집으로 옮긴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습관처럼 TV를 켜거나, 그마저도 귀찮은 날에는 일단 거실 소파에 몸을 던진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멍-하게 머문다. 뭐라도 할까 싶다가도 그렇게 그냥 머문다. 어이- 뭐가 그리 급하신가? 하루 중 분침 녀석이, 가장 분주하게도 서둘러 회전하는- 그런 시간대이다.


역시 오늘 헬스는 피곤... 날씨도 너무 춥다? 그러니 러닝도 조금 무리다. 어떻게든 창가 쪽 책상까지 내 몸을 밀어 본다. 그리고 위스키 한 병, 책 한 권, 노트북을 일단 앞에 올려둔다. 30ML 조금 넘게 위스키 한 잔을 잔에 따른다.


해냈다.


이 한잔은 바에서는 만 오천 원에서 이만 오천 원. 리쿼샵에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했다 하더라도, 오천 원쯤은 된다는 거. 그러니 이제는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첫 향을 가볍게 맡았다면, 노트북으로 Youtube에 접속한다. Chet Baker, Cigarettes After Sex, Ryuichi Sakamoto, ADOY, 92914 등 요즘 즐겨듣는 노래들을 플레이 리스트로 일단 담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고 오른쪽에 있는 주황색 조명을 켠다. 이쯤 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읽고 있던 어느 책에 집중해 볼 수도 미뤄왔던 일이나 작업도 이어서 진행해 볼 수도 있다.


오늘은 그냥 나만의 잔상노트를 작성한다. 위스키 라벨에는 제법 많은 정보가 있다. 그리고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도 담겨있다. 그중 하나가 'The'에 대한 이야기다. 위스키 브랜드 공식명 앞에 'The'가 붙어 있는 위스크 브랜드는 3개뿐이라 한다. The Macallan, The Balvenie, The Glenlivet.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브랜드들이기에 왠지 The가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다. 물론 브랜드 공식명 앞은 아니더라도 라벨 디자인으로 The를 붙여 표기하는 위스키들도 있긴 하다.


지금 마시고 있는 건 The Macallan이지만 The에 대해서는 The Glenlivet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실제로 압도적인 맛을 자랑하던 Glenlivet은 19세기말 많은 경쟁사들이 Glenlivet의 증류소를 베꼈다고 한다. 심지어 이름조차 따라한 '땡땡 Glenlivet'도 있었다니. 무슨 성수동 스타일, 강남 스타일도 아니고. 하여간 결국은 영국 법정 소송을 거쳐 법원이 본래 Glenivet 증류소에만 'The Glenlivet'이란 이름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판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위스키는 The Macallan 12 Years Old이다. 이야기가 이렇게 빠질 거였으면 The Glenlivet을 마실 걸 그랬나 보다. 나는 쉐리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The Macallan 12 Years Old를 먼저 권해보고 싶다. 상큼한 과일향과 함께 몸으로 들어와 매력적인 향수로 변해 코를 타고 나오는 깊은 향을 경험해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 개인적으로 쉐리위스키 중 매운맛이 가장 부드러운 편에 속한 이 위스키가 늘 부담이 없이 끌린다.


내 기준에선 위스키는 마실 때마다 맛이 다르다. 그날의 컨디션, 기분, 장소, 음식 등에 따라 다른 거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유지되는 하나의 '결'은 있어서. 매번 다르지만 같은 게 또 위스키다움이다 생각한다. 간단하게 테이스팅 노트를 기록해 두며 이야기를 마친다.



The Macallan 12 Years Old

92914의 Okinawa를 들으며


Nose

상큼한 과일 향이 먼저 올라오고, 그 뒤를 은은한 꽃향이 따라온다. 밝고 가벼운 인상이 기분 좋게 감돈다.


Palate

입에 닿는 순간 향긋함과 달콤함이 부드럽게 퍼진다. 목 넘김은 매끄럽고, 피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스파이스는 셰리 위스키 중에서도 가장 약한 편에 속할 만큼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Finish

삼킨 뒤 올라오는 향은 조금 더 진해지고, 중성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기분 좋은 향수의 잔향을 남긴다. 긴 여운 속에서 향기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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