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변경선

두 번의 하루를 살게 되는 크리스마스 섬

by 써니

지구는 가로와 세로로 쭉 그어서 만든 경도선을 가지고 시간을 서로 약속하고 살아가고 있다. 영국의 그린위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아홉 시간의 시차 (+GMT 9)를 가진 나라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에 갔다면 워낙 짧은 시간이기에 입국과 동시에 시간이 이미 바뀌어 있다. 하지만 배를 타고 항해하다 보면, 경도선은 매일 한 줄씩 천천히 다가온다.


그 경도선을 통과하다 보면 배 안에서 쓰는 시간도 달라지며 다음 항구에 입항할 시간까지 차근차근 하루, 이틀에 한 번씩 시간을 바꾸게 된다.


선내 시간은 보통 오후 8시에 조정된다. 경도선을 가로지르는 날이 오게 되면 오후 8시엔 어김없이 선내 시간이 방송과 함께 자동으로 조정된다. (바늘시계나 전자시계도 자동으로 움직인다)


동쪽으로 계속 항해한다면 "1 HOUR ADVANCED" (1시간 전진했다. 오후 8시에서 오후 9시로)

서쪽으로 계속 항해한다면 "1 HOUR BACK, RETARDED" (1시간 후퇴했다. 오후 8시에서 오후 7시로)


시간을 바꾸면서 항해하다 보면 배 안에서도 재밌는 일이 일어난다. 어떤 날은 23시간을 살았다가, 또 어떤 날은 25시간을 살게 되는 이상하고 재밌는 하루를 보내는 때가 바로 경도선을 통과하는 날이다.



시간 말고, 날짜가 바뀌는 순간


기준 시간을 가진 영국이 정오(낮 12시)일 때, 우리나라는 시차로 인해 오후 9시가 된다. 이처럼 경도선을 세 개 넘어 3시간을 전진하게 되면,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영국과 정확히 12시간 차이가 나게 된다. 이 지점이 바로 날짜변경선이다. 동쪽에서 항해해온 배의 시각은 자정, 즉 00시가 된다. 그 지점이 바로 날짜변경선이다. 나는 동쪽을 향해 계속 왔으니까 이미 하루를 열심히 다 살았지만, 날짜변경선에 와서는 이미 다 살았던, 지나갔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그 선에 도착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미 지나간 7월 4일 같은 하루가 다시 반복되는 기분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종종 갔었던 다섯 번의 경도선을 지나야 볼 수 있는 남태평양의 크리스마스 섬은 두 번의 하루를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던 섬이다. 장장 15일 동안이나 항해를 해야 도착할 수 있고 적도에 가까워져 동쪽으로 90도 키를 잡고 수평선을 따라 쭉 항해할 때, 하루 이틀에 한 번씩 시간을 전진해 가며, 살아냈던 하루를 다시 한번 만나며 도착하는 곳이 크리스마스 섬이었다.


겨울 느낌이 강하게 드는 섬 이름의 어감에 안 맞게 적도의 나라다운 열대 야자수가 가득한 크리스마스섬.


날짜변경선은 기준이 되는 그린위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지구의 정반대 피지(Fiji)의 한 육지에 걸쳐있다곤 하지만, 한 국가가 두 개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혼란을 야기한다며 지금은 남태평양의 섬나라들을 이리저리 비켜가면서 그려져 있다. 이 섬나라들은 1999년에 새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앞두고, 각자 날짜변경선에 대한 합의를 국민투표를 통해 정하면서 저마다 어떤 날짜를 선택할 건지 자체적으로 정하기도 했다. 피지는 사실상 그린위치 천문대의 정반대 편에 있는 자기 섬의 날짜변경선이 순수하게 날짜가 바뀌는, 어제와 오늘이 공존하는 곳이라며 홍보하고, 아메리카 사모아는 날짜변경선을 걸친 두 섬을 활용해서 2000년의 1월 1일을 두 번 살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며, 타라와는 가장 빨리 해가 뜨는 국가가 될 거라며 시간을 가장 앞당기기도 했다. 2000년의 첫날이 아니더라도 매년 이렇게 새해마다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서 남태평양의 섬나라들을 지나갈 때마다 재밌다고 생각했다.



날짜변경선을 돌아오며, 어떤 기회를 받고 살고 있는 것인가에 관한 질문


물론 다시 한국에 돌아올 땐 살아보지도 않은 하루를 반납해야 한다. 결국 시간과 날짜는 인간이 만든 약속일 뿐이다. 우주의 시간, 모든 공간에서 흐르는 시간은 영겁의 세월 속에 묻혀 숫자로 나타내는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마냥 몇 살로 정의하기 힘든 개개인만의 경험들과 나이와 세월로 늙어간다. 언젠가 세상을 떠날 순간이 오게 되면 경도선을 몇 번 넘은 것만으로 쉽게 바뀌는 시간의 양처럼 각자 담아 온 삶의 내용들도 많이 다양하겠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이유도 쭉 그어놓은 경도선처럼, 날짜 변경선처럼 다른 사람들과 누군가 정해놓은 시간들과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각자 어떤 이야기를 담아서 살아내 볼 수 있는지 기회를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누가 더 특이하고 대단한 삶을 살았는지의 경쟁이 아니라 언젠가 뒤돌아보면 그땐 참 별거 아니었는데 참, 그때 좋았지 하는 순간과 행복과 기억을 하나씩 담아가는 삶을 가져가라는 듯.


날짜 변경선을 넘어 도착했던, 두 번의 하루를 살게 했던 크리스마스 섬이 준 이야기들로 시간과 날짜와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했던 그날의 경험들로 내 승선생활의 한 구석을 채웠다. 직접 내려서 둘러보진 못했지만 예쁜 이름과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 줬던 크리스마스 섬을 언젠가는 또 지나갈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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