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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Jul 14. 2024

스물 일곱, 나의 파도소리 방파제

12만 원짜리 밤바다 낭만

선박 기관사가 되기 전 대학생  때는 록 밴드 동아리를 열심히 했었다. 음악은 배운 적이 없었지만 그룹사운드의 매력에 빠져서 나에게 대학시절은 그 자체로 록이었고 심지어는 밴드 활동을 하느라 수업에 많이 빠져서 결국엔 교수님이 졸업하고 딴따라가 될 예정이냐며 다그치기도 하셨다. (음악인이 나쁘다는 게 아니었을 거다. 학업에 충실하지 못한 나를 나무라셨다). 나의 첫 밴드 그룹명은 파도소리방파제. 축-축 몰아치는 파도소리가 방파제에 부딪힐 깨지면서 퍼지는 소리를 다들 번쯤은 들어봤을 같다. 바람소리와 섞여서 시원하고, 저 멀리서 몰려오다가 결국엔 방파제에 다다라서 부딪힐 때는 청량하게 화음을 내며 흩어진다. 소리를 들으러 지금도 새만금 방조제에 가끔 찾아가 삼-사분 정도 지긋이 파도소리와 방파제를 지켜볼 때가 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바다에 나와서는 특히 음악이 그리웠다. 목적지가 남태평양의 정확하지 않은 어딘가로,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 채로 출항했을 때도 많았는데 그럴 땐 몇 개월간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곤 미리 다운로드 받아 온 음원 파일 말고는 갑판에 나가서 선체가 바다를 가르고 나갈 때 들리는 매일 똑같은 파도소리밖에 없었으니까. 진짜 사람들과 직접 연주하고 같이 노래하는 거. 그런 게 그리웠다. 그래서 매일 같이 노트북에 저장해 둔 대학생 때 합주했던 영상들, 공연 영상들을 질리지도 않고 계속 듣고, 반복해서 쳐다봤던 때가 있다.


두 항차쯤(6개월 정도) 지났을 때 부산항에 들어와서는 배에서 막 쓰다가 버릴 생각으로 중고거래 앱에서 12만 원짜리 통기타를 하나 사 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밤에 근무가 끝나고 나면 인도네시아 선원 친구들과 갑판에 삼삼오오 박스를 깔고 모여 앉아 남태평양 바다에서의 합주가 시작됐다. 그때만큼은 우리의 서투른 업무용 해사영어 말고, 겨우 배운 인도네시아어 옹알이 말고, Jason Mraz의 Im yours , Maroon5의 sunday morning 같은 다들 아는 노래를 하나씩 골라서 부르거나 친구들이 알아듣거나 말거나 '비와 당신'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먼 나라에서 한국 배에 승선하러 왔지만 다들 똑같이 젊었고, 나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으며, 다들 디지털로 변환된 목소리 말고 생생한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그리웠었던 것 같다. 우리가 갑판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고 맥주를 마시고 적도의 밤하늘을 보면서 별을 구경하다 보면 브릿지에서 항해하는 2등 항해사가 몰래 살짝 불을 켜주거나 윙브릿지에 나와서(조종실에 맨 끝 날개, 사방을 살필 수 있게 트여 있다) 자기를 봐달라는 듯 춤을 추거나 아끼는 담금주를 500ml 페트병에 담아 던져주곤 했다.


낮 동안의 열기가 식을 때 쯤이면 내 기타를 빌려 삼삼오오 갑판으로 나왔던 친구들. 아직도 건강히 승선 중이다. Erik, Kairul, Dulwahid, Aung pyo hein


배 안의 격실은 각지고 온통 직선이다. 그리고 파도에 흔들릴 때 무언가 미끄러지지 않게 온통 서랍이나 냉장고, 책상 전부 미끄럼 방지 패드가 깔려있고 열리지 않게 이중으로 고정장치가 되어있다. 이것들 마저도 온통 직선에 각진 것 투성이인데 3등 항해사 Erik이 방에 놀러 와서 말해줬다.


네 방은 온통 직선이고 각지지만 저 둥글둥글한 통기타가 하나 있어서 그것만으로 차분해질 수 있어. 아무튼 노래하자!- 오늘은 뭐 할래?


웃겼다. Erik은 인도네시아 해사대학을 졸업한 유창한 영어실력을 가진 그 나라에선 꽤나 훌륭한 엘리트였다. 노래 부르는 걸 꽤나 좋아해서 늘 대뜸 찾아와서는 같이 노래하자며 기타를 쳐달라고 조르고 졸고 있는 나를 깨워 소파에 앉혔다. 나이도 동갑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는 친구다.


사실 인터넷이 안되니까 악보를 찾을 수도 없고 아는 노래는 한정적이니까 우리의 플레이리스트는 늘 같은 레퍼토리였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겨우 12만 원을 투자해서 그렇게 태평양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고 왔는데. 내가 평생 들었던 파도소리방파제 중에 가장 최고는 역시 그 남태평양 적도에서 친구들과 함께 앉아 노래하고 놀았던 그 사운드다.


얼마 전 아끼는 물건이나 보물이 있냐고 질문받았는데 아무래도 값비싼 고급 기타는 아니지만, 나랑 같이 저 멀리 적도까지 다녀온 추억 많은 이 기타가 아닐까 싶다.


넌 슬퍼하지 마, 이 시간만은 우리 거야.
노래나 부를까?
가사는 잘 몰라도 다 같은 마음이잖아.
춤이나 춰볼까?
방법은 잘 몰라도 다 신경 쓰지 않잖아.

나상현씨밴드 -노래나 부를까?-

오늘 갑자기 노래를 듣다가 나상현씨밴드의 노래나 부를까? 를 들으며 그 컴컴한 남태평양 바다에서의 낭만이 떠올랐다. 가사나 방법은 잘 몰라도 우리가 쓰는 이 시간에 그저 노래하고 춤추면 써낸 추억들은 소중하게 남아있게 된다.


대학 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밴드에 미쳤었던 시절. 역시 아직까지는 인생 사는데 내가 미쳐서 열심히 했다면 도움 되지 않는 게 하나도 없다. 그 바다에서 배웠던 건 굳이 많은 사람을 불러서 구성을 맞춰서 하는 그런 어려운 밴드 말고, 그냥 통기타 하나만 있어도 옆에서 노래를 불러주면 그 자체로 합주가 되는 거. 그런 소소한 소중함을 알게 된 스물다섯, 스물일곱에 먼 나라 친구들과 함께했던 태평양에서의 파도소리방파제가 나한텐 가장 고마운 밴드사운드 중에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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