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주 수요일은? 문화의 날이면서 스크린X 데이. 반값은 아니더라도, 정가보다 5000원 싸게 볼 수 있다. 상영 전 시간대에 할인 적용돼서 장점이 있다. (영화관에서 보는) 새해 첫 영화를 통 고르지 못하고 있다가, 할인 소식에 흥분해서 하루 두 탕 영화 뛰었다. 시너스와 시라트. 시자 돌림 두 편. 용산에서 신촌으로. 중간에 밥을 빠르게 먹고 논스톱으로 달렸어야해서 시라트 초반에 살짝 위기가 왔지만, 두터운 베이스 소리에 금방 정신을 차렸다. 영화가 좋았어서 놓친 부분이 있는 게 아쉽다. 1. 밥 먹자마자 영화를 보지말 것 2. 신촌 CGV 아트하우스관은 엘리베이터 타지 말고 유리문 통해 지하로 내려갈 것.
시너스의 좋았던 점은 공동체의 힘을 보여준다는 것.
언제부턴가 나는 세상을 이해할 때 개인을 앞세우게 되었고, 그에 따라 결과를 해석할 때 제도의 부조리보다 자유의지의 방향을 핵심 준거로 삼았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보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개인을 전면에 세우고 상황을 해석하면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이 문제다.' 한 가지로 귀결된다.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으면 / 판단하지 않았으면]으로 이어지고 '다음에 내가/네가 더 잘해야지'로 매듭지어진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통제 불가능한 것이니, 바꿀 수 있는 나를 고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라는 믿음에서다.
나는 사람이 강하다고 믿어 왔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개인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혈연, 학연, 지연보다 더 강한 것은 개인의 의지이며 그것은 제 자신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다. 이런 태도는 좌절의 문턱에서 나를 여러차례 건져냈다. '나만 잘하면 된다'를 [나 빼고 다 잘하고 있다]가 아니라 [나만 정신차리면 다 잘 된다]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주 무너지지 않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내가 관여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됐다.
소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와 맞물려 있을 지 모르겠다. 소속을 갖는 순간 나의 일부분은 그 소속의 특성으로 치환된다. 소속의 특성 중 일부는 나를 대변할 것이고, 대부분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대부분의 것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그것은 집단이지 내가 아니니까. 내가 벌인 일이 아니라 집단이 벌인 일이니까. 내가 정의하지 않은 것으로 내가 설명되고, 내가 벌이지 않은 일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중이 절을 떠나듯 도망친 것이다. 나 하나라도 건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러나 관계가 생기고 역할이 부여되면서 내가 점점 커지니, 모든 것을 개인으로 환원해서 끌어안기에는 감당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컸다. 당연하게도, 나의 정의가 세상과 같은 맥락에서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화살을 돌린다한들 내 속만 편해지고 그만이었다. 상대에게 화살을 돌리면 오히려 공허해지고 메슥거렸다. 시대와 배경 탓을 하자니 무력해질 뿐이었다. 더 많은 아픔을 이해하기엔 팔이 짧음을 통감했다. 아무리 넓게 벌려도 다 품을 수 없으니, 함께 안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됐다. 흑인들이 블루스를 부르며 연대한 것처럼, 아이리쉬들이 민요를 부르며 단결한 것처럼, 한국인들이 강강술래를 돌며 단합한 것처럼.
슬픔에 함께 대항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존재 자체만으로 큰 위로가 된다. 비록 내 마음같지 않은 때가 잦고, 내 의도와 무관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생길 지도 모르지만, 다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해답을 찾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함께를 믿어보기로 했다. 내가 포함되지 않은 상황에도 마음을 써보기로 했다. 내가 포함된 일에는 더 열을 내보기로 했다.
국가대표팀 경기를 보면서 소리를 지르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같이 영상자료원에 가자고 말하고, 가족들과 친구들과 솔에게 더 자주 보고싶다고 고백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