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확신들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것.

영화 콘클라베

by 보브

영화를 보는 내내 올 초에 읽었던 이승우 작가의 ‘고요한 읽기’의 한 부분이 생각났다.


"종교는 자기 확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종교는 자기 확신의 부재,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의 믿음이다.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 (폴 틸리히) 이념은 반대다. 이념은 의심하지 않는,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끼어들어서는 안되는 투철한, 무분별한 믿음의 체계이다. 이념은 투철한 확신을 가진 광신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광신자들에 의해 막강해진다.”


“우리의 현재는 여전히 확신이 사실을 삼키고 있는 시대이다. 사실이 어떤 곳에서도 한 번도 확신을 뒷받침한 적 없다는 그의 두 번째 문장이 여전히 유효한 ’현재‘이다. 현재가 어느 시대보다 더 확신에 지배되는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시대 못지 않은 확신의 시대라는 건 확실하다. ‘사실을 말하는 자는 죽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경고가 탄식처럼 들리는 이유이다.” - 이야기를 어디서 어떻게 끝낼까, 고요한 읽기 중




콘클라베를 이끄는 추기경 단장 로렌스는 교황 선출 투표를 앞둔 103명의 추기경들 앞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의심을 품지 않은 확신이며 확신은 통합과 관용, 그리고 포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이라고’

‘신앙은 정확히 의심과 손을 잡고 걸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이기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줄 아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신성한 공간 속 세속적 욕망이 들끓는, 소리 없는 완력 다툼에서 그의 기도는 그 어떤 기도보다 외롭고 괴롭다. 그렇기에 절실하다. 이는 콘클라베 그 안에서만 국한된 절실함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가 강력한 자기 확신에 빠져 선함을 빙자하며 상대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으로 유난한 지금이다. 그것이 이념이 되고 진리가 되어 광신도의 집단으로 변해가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자기 반성’일 것이다.


-올 초에 나온 영화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과 맞물렸다.

과연 그 누가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무결하다)가 될 것인가,


-영화 ‘두 교황’을 통해 이미 콘클라베 투표 과정을 알기도 했지만 ‘두 교황’속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화도 떠올랐다. 상반된 가치관을 가진 두 사람이 다름을 인정하며 서로에 대한 존중과 품위를 지키는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선에 대한 가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그 지향점 말이다.


-12.3사태와 곧 있을 6.3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최악을 피하고자 하는 선택적 차악이 아니라 차선에 차선을 더한 최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비밀스럽고 중압감이 느껴지는 콘클라베의 긴장감이 영화의 연출 특히 미장센과 음향 그리고 촬영 구도로 더없이 팽팽하다. 보여지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상상하게 한다.

물론 랄프 파인즈의 고뇌에 찬 디테일한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conclave, Edward Berger, 2025

Concl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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