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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이d Mar 14. 2022

재건된 척추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6-페인 앤 글로리(페드로 알모도바르,2019)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둘째 이모부는 호인이었다. 몸은 다부지고 단단한 느낌의 각진 턱과 목소리 또한 호쾌한 분이었다. 이모와 이모부 모두 그 세대의 많은 분들이 그러했듯 학력이 높진 않았지만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집안의 구심점이 되어주는 분들이었다. 어릴 때는 자주 이모부의 취기 오른 발그레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술을 아예 끊으신 후에 뵈어도 그 행동과 말투에서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술에 휘둘릴 정도로 드신 적이 없던 것이고, 성격이 원래 낙천적이고 활달한 분이었던 거다. 이모부를 지금 기억할 때 당신은 타인을 대하며 좋고 싫고를 나누어 누구는 밀어버리고 다른 누구는 끌어당기는 식으로 나누어 사는 분이 아니었다.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이야~'라고 하는 이모부만의 추임새가 있는데 그러면서 상체를 한쪽으로 살짝 트시는 그 몸짓이 지금도 눈과 귀에 선하다. 어릴 때부터 두툼하고 거친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며 예뻐하셨다.


 이모와 이모부는 현재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 전에는 꽤 오래 언덕배기 오래된 달동네에 사시며 세 자식을 다 키우고 시집 장가 보냈다. 그곳에서의 시간이 무엇보다 그 다섯 가족에겐 남다르게 기억되고 있을까? 나는 각별하게 기억한다. 흔히 '제 2의 고향'이라는 말을 쓰는데 내게는 그곳이 두번째 고향같은 곳이다. 고향은 도시가 아니고, 지역도 아니며 누군가에는 한뼘 작은 동네로 충분할 수 있다. 언덕 끝가지 올라가면 오래된 놀이공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놀이기구들은 다 빠지고 전체적으로 시민 공원으로 재정비가 됐는데 그 후로는 한번도 찾아가 본 적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이제 다 없어졌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은 뿌리가 깊어서 지금도 마음에 생생하다. 생각이 나서 그곳을 찾아갈 때가 있는데, 아직 그 지역이 내 안에 남긴 원형은 고스란히 있어서 어느정도의 권역에 들어서면 나는 어느 한 시절의 존재로 변신해서 그곳을 거닌다.  


과거, 꿈이자 실재로써 방향타가 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회한(悔恨/回翰)을 척추뼈로 해서 과거로 돌아가고, 한편으로 내게 마주 오는 과거의 흔적을 발견하는 추억과 자전(自傳), 회복에 관한 영화다. (회한의 두번째 한자어에는 이런 뜻이 있다. '답하는 편지를 보냄. 또는 그 편지'.) 시간을 의식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과거를 보는 것은 회고와 퇴행으로 뒤를 돌아보는 행위가 아니다. 과거를 제대로 돌아봄으로써 무한대로만 뻗어갈 수 없는 나의 미래는 더 나은 방향을 짚어낼 수가 있다. 또 한편, 과거를 살핀다는 것은 몸이 가진 시간의 선형성과 맞선다는 의미도 있다. 인간이 시간을 선형적으로 의식하는 것은 어쩌면 점차 노쇠해지고 죽게 되는 몸과 함께 경험하는 소멸에 대한 실재 또는 상상 때문일 수도 있다. 과거는 내가 아직 건강하고 팔팔하던 시절의 꽃같은 판타지이며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내 안에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곧 나이듦의 왜소함과 맞서는 실재적인 힘이 된다는 측면에서 단지 서글픈 추억담은 아닌 것이다. 물론 우리는 대체로 그런 식으로 과거를 느끼지만 말이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 살바도르의 과거는 개인의 상념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그것이 글이 되기도 하고 연극이 되기도 하고 최종적으론 한편의 영화가 되며 거듭 바깥으로 드러나며 타인과 공유된다. 알모도바르 본인을 투영했을 주인공 살바도르는 영화를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지만 지금은 더이상 영화를 만들 힘이 없다. 그 이유는 육체적으로 약해진 데도 있지만 그의 존재가 어느새 고갈돼 버린 것이다. 감독의 경력을 시작한 이래 "버는 족족 집과 그림에 투자를 했다"는 살바도르의 세계는 색으로 가득하다. 원색으로 가득한 그의 집과 그 부속품들, 그가 입은 옷들은 그가 구축해온 삶의 외향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의 외향적 원색은 분명 멋지다. 현대적인 외향성 또는 외향성의 현대화가 SNS를 통한 '과시적이고 과시적인' 과대 과시인 것과 다르게 살바도르의 외향은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이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응집돼 있어 내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화려하지만 공허하지 않다. 그가 자기 취향을 성공적으로 정립했다고 해야 할까? 그보다 나는 앞서 말한 그 대사에서 단서를 찾는다.

 "버는 족족". 이곳은 그가 노동으로 이룬 세계의 결과물이다. 분업화된 노동이 상식이 된 세상을 사는 우리는 개인이 되기 위해 분리되야 하는 것처럼 일과 임금, 그리고 사생활을 분리해서 살아간다. 내가 번 돈은 나의 취향과 열정이 흐를 수 있는 길이 되어준다. 길로써의 가치.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닌 도구로써의 길. 그런 식으로 사생활의 영역엔 나를 표현하고 개성화하는 물건, 디자인, 문화적 자산들이 채워지고 배치되는 식이 된다. 살바도르의 집도 그렇게 일을 함으로 받은 자본을 마음껏 투자해 완성한 결과물일 수 있다. 또는 예술가로 살면서 일과 개성이 분리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의, 상대적으로 생계와 취미가 일치된 사람의 특권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 느낄 때는 그 두 가지 경우가 모두 아니라고 본다.

 

살바도르의 집은 화려하고 그가 특별히 애정을 갖고 있는 오브제들도 그 안에 있겠지만, 과시적 성취로 자리매김하지 않는다. 여기엔 하나의 진술이 더 붙는다. “나는 영화를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어요”. 그에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일인 동시에 즐거움이며 그 두 가지 모두 자기 존재를 붙드는 의미의 축이 된다. 노동의 고통과 여가의 즐거움을 양쪽에 두고 나의 여건과 판단에 따라 힘의 투자를 배분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뇌에 빠지고 어느 한쪽을 어느정도 포기(주로 여가가 그렇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게 될 때, 일은 얼른 끝내야 하는 것이다. 일이 끝난 후에 누리는 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여유는 가능한 더 오래 이어지길 바라게 된다. 반면 살바도로의 말과 집에서 나는 힘들지만 이 일을 계속 하는 게 좋다는 자기 내적인 고백과 과거를 과거로 남겨둔 채 또 한번 일의 고단함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는 태도를 읽는다. 노동의 과거를 보상의 현재로 자리매김해 그것을 미래로까지 이끌고자 하지 않고 다시 빈 손의 노동자가 되어 미래에도 기꺼이 새로운 일에 자신을 들이미는 것이 가진 자기 긍정과 ‘안정에 대한 부정’이 살바도르의 집을 전시장이 아닌 화려하지만 여전히 집인 곳으로 만든다. 그의 집은 안식처이자 은둔자의 동굴이지만 집착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자랑의 대상도 아닌 것이고. 그는 자신의 집 안에서 마이다스 왕처럼 기고만장하지도 않으며, 가계의 비극에 쪼그라든 오이디푸스처럼 궁색하지도 않다.


그렇게, 항상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그곳으로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이지만 지금 그의 팔레트의 물감들이 다 말라버렸다. 붓도 털이 다 빠져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공허한 정적 속에서 그는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하는지도 감을 못잡고 있다. 그런 그의 상황은 흉터와 절룩거림으로 증명되는 그의 몸이 영화의 맨 앞에 놓이면서 시각화된다. 이 영화에서 건강과 창작 에너지의 소진 사이에 선후 관계는 없다. 두 가지가 함께 가는 셈이다.

고통이 있기에 치유의 경험에 문이 열리다

“그를 알아보게 하는 흉터는 그의 육신 안에 있는 영혼의 표시이다. 그것은 신체화된 정신인 아니마의 봉인인 것이다.”(제임스 힐만, <뿌에르의 상처와 오디세우스의 상처>)


영화의 제목 ‘페인과 글로리 사이’. 여기서 방점은 ‘and’에 있다. 여기서 고통은 명확하다. 살바도르의 노화, 창작 의지의 저하, 실제로 몸이 겪는 고통들. 하지만 영광은 모호하다. 그것이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그의 영화적 경력이 받아왔고 앞으로도 받게 될 박수를 말하는걸까? 알모도바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영화에는 알모도바르 자신과 영화 속의 살바도르라는 두 창작자의 자아가 존재하는데, 페인과 글로리에 있어 두 개의 자아가 분열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기 이야기를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두 개의 마음: 고통에 대한 자기 연민과 받아들임이라는 두 마음, 영광에 대한 무심함과 기대 심리라는 두 마음같은 분열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글로리는 결과가 아니다.


32년 전의 영화 <향취>를 다시 보며 깨달은 바가 있는 살바도르는 당시 영화 촬영을 하며 결국 결별하게 된 주연 배우 알베르토를 다시 찾아간다. 마침 헤로인을 하던 알베르토를 통해 마약을 접하게 된 살바도르는 그 후 직접 마약을 구매하기도 하는 등 조금씩 약에 젖어간다. 그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는 찡그린 얼굴이나 신음소리가 아니라 그가 투약을 하는 모습으로 증명이 된다. 살바도르에게 고통은 단지 고통이 아니라 ‘고통과 진통제’ 또는 ‘고통과 잠듬’인 것이다. 헤로인을 하는 것으로 고통을 잊고 두뇌가 무의식 세계 안에서 각성하는 것으로 그는 과거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그때의 과거는 시각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 다른 모든 감각들이 같이 쏟아져 나오는데 살아있는 기억이란 감각 전체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문장 하나 “내 어린 시절의 극장이란 암모니아 냄새(오줌 냄새)와 자스민 향기 그리고 여름 바람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런 장면. 엄마를 비롯한 어른 여인들과 함께 빨래터에 있을 때의 눈부신 물의 표면, 그 속에 빠진 하얀 비누, 빨래하는 냄새, 여성들이 부르는 민요. 살바도르는 몸의 통증을 견디기 위해 헤로인을 하지만 과거에 들어가 살기 위해 헤로인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약이 가진 사회적 의미가 가진 도덕적 위계를 벗기고 이 안에서만 본다면 마약은 낫기 위한 방식인 것이다. 더 잘 꿈꾸기 위한 방법.


그렇지만 헤로인은 곧 그가 고통에 굴복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정확히는 육체적 고통뿐이라면 굴복하지 않았을 외로움과 고독, 더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굴복한 것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초반부에 나오는 학습에 대한 고백이다. 어릴 때부터 예술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학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영화를 찍으며 세계를 돌아다녀 지리학을 익힐 수 있었고 척추와 관련된 몇 번의 대수술, 편두통 등의 증상을 통해 해부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살바도르에게는 자신이 곧 학교이자 선생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배운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를 통하지 않은 학습은 내 지식으로 남지 않는다고 볼 때 그는 제대로 배운 삶을 산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살바도르는 더이상 그렇게 자신의 개인적 삶에서 긍정적인 무언가를 얻지 못하고 있어 결국은, 마약을 선택한다. 운이 나쁘게 그 시간에 알베르토에 간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살바도르는 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것만이 방법은 아니었겠지만 그때까지 그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하지만 항상 기회는 두 개의 얼굴을 하고 하나씩 차례대로 보여주는 법인가? 알베르토는 살바도르의 ‘중독’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말한다. 처음엔 거절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중독’은 상연되고 그 이야기가 가상의 존재인 ‘나’가 아닌 살바도르와 자신의 이야기인 것을 직감적으로 안 옛 연인 페데리코의 방문은 살바도르에게 숨어 있던 생기를 다시 불어넣는다. 눈물 어린 포옹과 키스,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있는 서로에 대한 갈구. 존재가 치유되는 것의 시작은 늘 그렇다. 에로스. 감각이다. 살바도르는 페데리코와 헤어진 후 약을 끊는다.


고통(과 헤로인)에서 멈추질 않고 그가 어떻게 다시 자신과 또렷한 정신으로 만나며 재기에 성공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중요한 이 영화에서 ‘글로리’는 결과값이 아니다. 그가 헤로인을 변기에 버리는 순간 그의 영광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 연관에 있어 영화의 제목은 ‘페인’ ‘앤’ ‘글로리’가 아니라 ‘페인’ ‘앤 글로리’인 것이다. 그렇게 볼 때 and…….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길로써의 저 표현이 정말 아름답게 읽힌다. 자기 뇌, 방 안에서의 은폐된 만족과 독자적인 환상에 취하지 않고 어떤 고통 중에라도 바깥으로, 누군가와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연결점을 뜻하는 모든 것들이 내포한 회복의 가능성은 아름답다.

봄 눈 에로스와 검은 흙의 하데스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는 날개 달린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 영화에서의 에로스는 상승이 아니라 침전과 연결돼 있다. 지하 세계 곧 하데스의 영역까지 가라앉는다. 50이 넘은 남자가 경험하는 에로스란 그가 늙었지만 여전히 팔팔하다는 것을 침대에서 증명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서 에로스는 몸-성()이 아니라 그의 내적 존재가 시간의 순환 안에서 다시 꽃 피우는 것을 말한다. 이제는 마지막이고 그 끝은 역시 겨울인 줄 알았는데 또 한번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그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준비에 대한 문제가 이 남자의 에로스이다. 그리고 그때의 봄맞이는 단지 만개한 꽃에 대한 환호인 것만은 아니다. 그 꽃들의 뿌리를 촉촉히 적신 검은 흙의 의미를 동시에 보는 것이다. 언제나 꽃의 젊음은 죽음과 부패의 토양에 기초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고루 보고 느끼는 감각이 어느 시점엔 꼭 필요한 자질이 된다. 이제 살바도르는 그래야 한다. 과거의 일들, 기억의 빨대로 빨아먹은 그 단편들 속에 존재하는 나의 어머니와 학교, 음악 시간과 에두아르도의 나신, 그에게 글을 가르치던 일은 잘 부패한 상태로 양질의 토양이 된다. 저 밑, 하데스의 영역으로 내려간 무거운 몸의 에로스-살바도르는 과거의 유령들을 만나 자신이 한 시절의 꽃으로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죽음이며 부활이며, 과거이자 미래이고, 꿈이자 현실이다.


에두아르도, 아두아르도! 살바도르에겐 영원한 과거로 남을 그 꽃다운 청년 에두아르도는 한 시절의 남자이지만 살바도르의 진정한 아니마였고 중심축의 지킴이였다. 살바도르는 에두아르도에게 글을 가르쳤다. 에두아르도는 살바도르의 집의 타일 공사를 해주었다. 살바도르는 에두아르도에게 씻을 물을 제공했다. 에두아르도는 책읽는 살바도르를 그렸다. 에두아르도는 살바도르에게 편지를 썼다. 살바도르는 재활을 시작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에두아르도가 그린 그림을 발견한다. 에두아르도는 지금도 살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글과 산술을 배운 덕에 좀더 나은 직장을 다닐 수 있게 됐다. 살바도르는 에두아르도의 그림이 전시된 곳에서 그 그림을 사게 된다. 전시회는 이름 없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별해 전시하는 자리였고, 그 그림은 마드리드의 벼룩시장에서 발견된 물건이었다. 살바도르는 그림 뒷편의 에두아르도가 쓴 편지를 읽고 눈물 흘린다. 30년도 더 되어 도착한 그 편지에는 세상 유일한 사람 살바도르만이 느낄 수 있는 향기가 있다. 향취! 그가 32년 전에 만든 영화. 그는 알베르토의 연기가 그때는 못마땅했는데 더 나은 해석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살바도르는 <향취>가 긴 비평의 시간을 견뎌낼 만한 작품인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프루스트는 다시 한번 옳았다. 회복에 이르는 기억의 첫 관문엔 항상 나만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있기 마련이다.


“치유는 부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 다만 그 자신의 썩는 곳의 냄새를 맞도록 그의 감수성을 새롭게 조율하기만 하면 된다.”(158p)

이 장면이 내 꿈이라면: 그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연극이 끝났다. 알베르토 그는 나의 가면이었다. 또는 내가 그의 가면이었다. 내가 알베르토를 통해 내 이야기를 했고, 알베르토는 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가면, 페르조나, 자신을 위장하는 자아의 몇 가지 캐릭터들. 우리는 둘 다 서로에게 진짜 존재이고 한 순간의 가면이기도 하다. 알베르토는 섬세하고 복잡한 나와 대비되는 사람이다. 과감하며 즉흥적이다. 공격적인 면도 있지만 뒤끝이 없다. 나의 우발적인 언행을 사과하며 <중독>을 공연에 올려도 된다고 하자 바로 문을 열어줄 정도로 본인의 근본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다. 알베르토와의 관계를 꿈속의 관계로 치환해서 본다면, 그는 살바도르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존재에 음영을 만들어주는 대립하는 존재로써 그는 그림자가 맞다. 그는 나, 살바도르의 슬럼프에 빠져 밋밋해진 삶에 다시 굴곡을 만들어준 계기가 된 존재다. 그림자와의 대면이 본격적인 치료의 시작, 드라마의 시작이라고 한다.

 나의 그림자이자 가면인 알베르토의 무대를 통해 과거의 연인이 찾아왔다. "당신의 페데리코가 왔었어". 설레는 이름이다. 나는 허리를 곧추세운다. 그리고 잠시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하지만 "여보세요"라고 한 후 저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단번에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페데리코다. 보고싶지만 지금은 밤이 너무 늦었으니 볼수 없다고 예의상 말하는 우리 두 사람. 이 상태로 밤도 샐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전화기를 든 상태에서 너를 봤다. 너는 나의 집 앞에서 전화를 한 거였지. 나와 같은 도시에 있지만 지금은 전화로만 만날 수 있는 곳에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숨바꼭질하듯 서로를 희롱하고 있을 뿐이었어. 아르헨티나에서 그 시절처럼. "저기 있잖아. 이렇게 전화 끊으면 어차피 잠은 못잘거 같아. 우리 지금 만날까?"

 이 장면은 순수한 멜로 그 자체다. 옛 사랑,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마무시한 영향을 끼친다. 그가 나타나면 나는 압도당한다. 황홀해진다. 그를 제외한 모든 것에는 눈이 멀어버린다. 내가 가진 모든 빛이 그 사람에게 간다. 꿈에서 그런 존재를 다시 만난다면, (해후의)지복과 (그와 떨어져 있는 현실의)괴로움에 눈물 흘리며 깨겠지. 그 사람으로 인해 나의 밤은 새로운 은하계가 탄생하는 시간이 된다. 개인적인 빅뱅. 다시 천만 수억 년의 시간을 살아가게 될 나의 우주가 새로 태어났다. 잘 모를 수도 있는데, 꿈 속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 만남을 가졌던 거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며 창조자인데, 그것을 실현 가능하게 되는 것은 혼자의 힘으론 되지 않는다. 누군가이 도움이 필요하다. 나에게 절대자인 그-녀라는 내 빛을 부여받은 당신. 타자이자 나의 중심.

"우리 지금 만나". 글을 닫으며.

작은 방울이 울린다. 품의 냄새가 난다. 나무 아래에서 시작한 바람이 길을 훑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인생 혼자라지만 절대적 고독은 절대적으로 유지되지 않고,  들어보면 나를  외진 방에서 불러 나오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외로움과 고통의 무게가 영원하지 않도록 굳은 날개를 다시  살필 때다. 우리는 직접 만나지 않고는, 조금씩이라도  안의 것들을 흘려보내지 않고는 삶의 전환과 존재의 변환을 알리는 소식을 감지할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조심스럽게라도 우리 지금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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