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건 많은데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한 건 많으면 어때. 다 내가 살아낸 일인데.

by 토토

Chapter.1 입사 동기를 아직도 못쓰는 이유


첫 회사는 대학 졸업 후 인턴으로 일하던 회사 대표님의 여자친구의 소개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봐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파트타임 잡으로 한 프로젝트의 에디터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상황상 입사 계기는 그렇다. 이러니 내가 입사 동기 같은 걸 여전히 못쓰는 거다. 그 이후의 몇 번의 이직도 정식 루트를 받아서 입사를 했다기보다는 아는 인맥이나 티타임을 통해서 들어갔기 때문이다. 취업을 아주 쉽게 봤다. 내가 관심이 있고 그 관심을 관계자에게 표현하면 우연히 취업의 기회가 열렸다. 그건 주니어 때나 그럴 수 있었던 것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치기 어린 도전과 당당함. 이젠 그런 당당함은 이력서와 경력기술서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만다. 나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초조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Chapter2. 긴 이야기(1)


1) 임팩트 투자사


이력서에는 임팩트 투자사를 다닌 걸로 되어있지만 정작 나는 임팩트 투자일을 해본 적이 없다. 임팩트 투자가 생소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회사는 기업과 대학교육에 그 개념을 알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사회문제 해결과 비즈니스 모델과의 결합. 그러한 사고를 위한 디자인씽킹이라는 문제해결 방법론을 기업과 대학에 알리는 일을 했다. 워크숍이라는 방법을 그때 처음 알았고 퍼실리테이션 역할을 처음 맡아보면서, 앗! 이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 낯선 사람과 대화는 어려워도, 워크숍에서 만난 사람의 생각을 이끌어내고 촉진시키는 것은 너무나 재밌고 흥미로웠다. 또 워크숍 교육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이 추상적인 디자인킹이라는 방법론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여러 책을 읽으면서 고민했다. 내 사전에 같은 기획의 워크숍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아이스브레이킹이던 개념을 전달하는 방식이던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나만의 방법을 만들어 나가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회사는 투자사로서의 정체성을 다져가고 있었지만, 나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투자보다 사람의 경험에 더 끌렸다.


내가 관심 있던 분야는 디자인씽킹과 서비스디자인. 둘의 개념은 달라 보이지만 디자인킹이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철학과 세계관이라면, 서비스디자인은 그 개념을 서비스를 기획하는데 접목시킨 방법론이다. 그 둘의 공통점은 공감하기-정의하기로 표현되는 지점에 있다. 바로 현장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사람 중심으로 그 문제를 정의하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론에 아주 푹 빠져버렸다. 사람들은 어떤 불편을 가지고 있을까. 사람들은 이 서비스를 왜 쓸까. 사람들은 이 서비스를 쓰면서 해소되는 것들이 무엇일까. 계속 분석하고 고객이 누구인지 그 고객을 만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리서치하는 것이 즐거웠다. 당시 회사가 운영하던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 안에는 서비스디자인 컨설팅 모듈이 있었는데,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기업들은 컨설팅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을 만나면서 서비스디자인 방법으로 고객의 정의하고 서비스 모델을 분석해서 시장을 확장하거나 피봇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데이터를 보여주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 일은 회사의 메인 비즈니스가 아니었다. 오직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나는 어쩐지 이 일을 잘 해내면서도 회사에서 소외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2) 시니어 헬스케어 IT 기업


투자사 이점은 요즘 스타트업의 투자 현황 정보를 잘 알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 리스트 중 가장 많은 투자를 받은 곳이 마침 내가 담당하는 프로젝트의 참여기업이었다. 나는 그때 기업의 미션, 시장 사이즈, 매출액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무조건 많은 투자금을 받은 곳으로 이직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기업에 찾아갔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이전 회사에서 서비스디자인 컨설팅을 했으며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했던 거 같다. UX리서치라는 직무가 마련된 건 아니었지만 마침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없던 직무를 만들어 입사를 하게 됐다. 그러나 그 일을 쉽지 않았다.


요양보호사 일자리를 연결해 주는 O2O 서비스였는데, 양면 시장의 고객들을 활성화해야 하는 일에 직면하고 있었다. 요양보호사 일에 대한 공급은 많았지만 요양보호사 일자리에 대한 수요는 크지 않았다. 가입만 해놓고 일하지 않는 요양보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왜 활성유저가 되기 어려운지 이 부분에 대해서 리서치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요양보호사들의 일자리에 대해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활성유저들은 왜 이 서비스를 쓰는지부터 접근했다. 고객 리스트에서 3개월간 일자리 매칭 서비스를 꾸준히 이용하고 있는 고객을 뽑아냈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CS문의가 활발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CS팀에서 여러 인터뷰이를 추천받았다. 하루에 3명씩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것도 5-60대 나이 지긋한 분들을 만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질문을 드려도 하고 싶은 말만 하셨고, 그 말도 너무나 길었다.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점점 강해졌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일을 쏟아부었다. 활성 유저와 비활성 유저를 모두 만나고 정성적인 데이터를 내놨을 때는 나는 이미 번 아웃이었다. 고작 6개월 만에. 이런 식으로 일하면 안 되는 거였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떻게 UX 리서처로 일해야 하는지. 게다가 조직은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는데 서비스는 개편되거나 개선되고 있지 않았다. 더 이상 리서치 주제를 찾을 수가 없었고, 리서치를 할 힘도 나지 않았다. 이 전 회사에서부터 과로로 망가진 몸은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두 손 두 발을 다 든 상태가 되었다. 알레르기성 결막염, 아토피, 소화불량, 불면증을 달고 살았다. 회사에서는 한 달 쉬고 오라고 했지만 내 몸은 그 정도로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만두고 말았다.


Chapter 3. 중간 회고


내가 너무 쉽게 일을 그만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지금껏 나를 따라다녔다. 조금 더 버텼더라면, 상황은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첫 회사에서 내가 선임일 때 주니어로 온 친구들은 누가 봐주지 않더라도 자기 자리에서 버텨서 이제는 누구나 알만한 회사에서 당당하게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어딘가 회한이 드는 것이다. 나는 어딘가 번듯한 자리가 알아서 마련되는 줄 알고 있었다. 자리는 버텨야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첫 회사에서 서비스디자인이나 디자인씽킹이 메인 주력 서비스가 아니었더라도 내가 그걸 끝까지 해냈더라면 어땠을까? 그 회사에서 오는 기회를 발판 삼아서 나만의 것을 더 만들어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두 번째 회사에서 UX 리서처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어땠을까? 번아웃이 올 지경까지 일하지 않고 천천히 그 일을 해나갔더라면 어땠을까? 한 달의 휴가를 잘 활용하고 돌아와 보는 건 어땠을까?


이런 뒤늦은 질문 가운데 공통점이 있다. 나는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회피해 왔다는 것이다. 다른 회사, 다른 일, 퇴사 같은 것들로. 다음에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chapter 4. 중간 설루션


1) 몰입으로부터의 보호하기

나는 일을 “경험하고, 분석하고, 구조화”하는 사람이다. 그 강점이 ‘몰입’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내면과 일이 동일시될 때 소진을 부른다. “몰입의 경계선”을 물리적으로 만들어둔다.


2) 버팀이 아니라 관통하기

‘버팀’은 상황에 맞서는 힘이라면, ‘관통’은 그 상황을 이해하고 통과하는 힘이다. ‘버텨야 할 때’와 ‘넘어가야 할 때’를 구분하는 기준을 세운다.


“이건 내가 성장하는 통증인가, 무너지는 통증인가?”

“이 문제는 나의 책임선 안에 있는가, 조직의 구조에 묻어있는가?”


3) 나의 일을 정의하고 지켜나가기

사람과 연결되는 일인가 (대면, 관찰, 인터뷰, 워크숍 등)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일인가 (문제를 정의하고 실험할 수 있는 구조)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한 문화인가 (속도보다는 맥락을 존중하는 조직)


4) 나 자신에게 친절하기

일이 잘 안 풀릴 때, 그 실패를 설명하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라고 한 번이라도 인정해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에게 덜 가혹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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