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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복 Jun 21. 2023

내가 그린 긴 기린 그림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면

드로잉_No.B2_oil on paper_34x24.5_2023




추상은 재현이고 현실의 극대화이자 축소판이다. 현실 그대로의 재현이 구상이 아닌 것은 추상을 통해 현실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꽃그림을 보면 꽃이 보인다. 꽃의 이미지와 색에 집중하고 꽃이라는 관념이 갖는 연관된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지시적이거나 제한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꽃을 보고 꽃이라는 관념 이외의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꽃은 어머니, 고향, 사랑, 여인을 떠올릴 수는 있으나 히틀러, 외계인, 트럼프, 아프리카를 떠올릴 확률은 낮다. 그러나 추상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한다. 추상적 이미지는 한계가 없고 규정된 관념이 없다. 그 재료가 가지는 에너지를 존재 그대로 여실히 드러내며 상상의 제한을 풀기도 하지만 오히려 지극한 그 에너지의 극명함으로 현실보다 더 현실을 체감하게 한다.


예를 들어보자. 모양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재질은 극명하게 드러나 있으나 형태는 알아볼 수 없는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재료의 극명함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현실성을 뚜렷이 인지한다. 또 그 재료가 가진 본질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형태를 유추하도록 유도한다. 반대로 사실(구상)은 오히려 추상적이다. 잘 빚어 놓았거나 세밀하게 가공된 극명하고 사실적인 형태는 오히려 환상적인 심상이나 재료의 대비효과로 인한 생경함을 불러일으킨다. 지나친 현실감각은 일순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뿜어낸다. 대표적인 작가로 안드레아스 거스키나 빌비올라, 아니쉬카푸어, 클래스 올덴버그 같은 대가들의 작품이 그렇다. 이들이 활용하는 도구가 구상이냐 추상이냐 제한 둘 수는 없지만 모두 형이상학적인 감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작품은 현실을 반영한다.


이렇게 의도부터 추상언어의 추상작품과 현실언어의 구상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다르게 기능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추상은 오히려 현실을 비추고 현실을 반영한 구상은 비현실을 비춘다. 쉽게 추상은 현실을 떠올리게 하고 구상은 판타지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한계를 풀어 제친 것처럼 보이는 추상이 현실적인 이유는 관념 없는 자연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 의미 없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같은 가사로 유희를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모든 현실세계를 극명하게 전달하는 구상(사실)은 작가의 초월적인 상상과 사람들의 환상을 끝없이 불러일으킨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 노래 가사가 마음을 때려눕히는 것처럼 말이다. 표현 방식에서 추상과 구상 둘 중 어느 쪽이 더 선호될지는 작가의 취향이다. 그 방식과는 상관없이 따뜻한 가슴으로 바라본 세상을 차가운 머리로 이해하고 잣대 없는 손으로 무언갈 창조해 낼 숙명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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