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달, 다른 우리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곳, 치앙마이에 간다는 것은 우리의 아주 먼 조상을 만나듯 그렇게 푸근하고 따뜻하고 정겨운 누군가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치앙마이는 한 달 살기의 성지가 되어 누구나가 한 번쯤 오래 머물러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한 때는 공기가 매우 안 좋으니 가면 안 된다는 얘기도 있었다. 다행히 내가 갈 수 있는 시기인 1월은 아직 논을 태우지 않는 시기였다. 2월부터는 연기가 온 사방에 자욱하고 분지라 연기가 나갈 곳이 없어 미세먼지로 온통 뿌옇다고한다.
항상 바쁘고 또 앞으로도 계속 바쁠 예정인 남편을 설득해 순례길에 나선다. 유은실의 소설 ‘순례주택’의 여파가 남아서일까? 우리의 여행이 순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도장깨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 조그만 지구에 있는 나라를 하나하나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56년을 살았던 한국은 어딜 봐도 새로운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른 나라가 궁금해 용기를 내어 순례에 나서 본다. 관광도 아니고 여행도 아닌 수도하는 승처럼 마음을 비우고 떠나 본다.
마음을 비워야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팔팔한 청춘이 아니니 여기저기를 모두 쑤시고 다닐 체력이 되지 않아서다.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다 쫓아다닐 수 없으니 관광이 아니다. 흔해 빠진 패키지 여행은 휴양지 한번 다녀온 후로 마음을 접었다. 남편과 홀가분하게 각자의 기내용 캐리어를 챙겨 비행기에 오른다.
6시간 4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날아 밤 11시에 도착한다. 사위가 어두우니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예약 시 나의 실수로 이름과 날짜가 꼬여 프론트 데스크 직원이 애를 먹었다. 체크인부터 시작이 순조롭지 않다. 여행의 시작과 끝, 아니 전부를 나에게 위임, 위탁한 남편은 나와 직원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으로 역할을 대신한다. 예약바우처를 한 장 한 장 꺼내 원초적인 영어를 동원하여 직원에게 설명했다. 착하고 예쁘게 생긴 ‘로즈’라는 이름의 직원이 천만다행으로 내 말을 알아듣고 방까지 업그레이드 시켜준다.
부푼 마음을 안고 올라가니 운동장만한 킹베드 침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편의상 우리는 부부관계지만 각방을 사용한다. 둘 다 오는 데만 이미 지쳐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아침을 맞아 밖으로 나갔다. 반팔을 입었는데 살갗에 닿는 공기가 좋다. 어디부터 가볼까? 첫날은 님만해민을 슬슬 둘러보기로 한다.
머무는 숙소에서 조금 걸어가다 발견한 얀타라스리 리조트 (Yantarasri resort). 문은 열려있고 아무도 가드하는 사람이 없어 내 집 들어가듯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온통 나무밖에 없다. 나무로 지어진 리조트 건물 가운데 있는 수영장, 리셉션 데스크에 있는 직원은 우리를 보더니 평화롭게 미소짓는다. 밖에는 마사지에 대한 메뉴와 가격이 나와 있다. 온통 마사지샵뿐이라 어디를 가야 할지 몰랐는데 이 리조트에서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도 한국의 반값이라 덜컥 예약해버렸다.
애초부터 우리는 무엇을 꼭 봐야 한다는 의식이 없었다. 여행계획을 세울 때 방문할 곳 리스트를 보고 남편이 던진 명언이 있다.
“거기까지 갔는데 어딜 또 가야 해?”
“아, 그렇구나. 6시간을 날아갔는데 거기서 더 멀리 가려고 하는구나.”
그때부터 우리는 발길 닿는 대로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순례를 하기로 했다. 하긴 순례는 목적이라도 있지, 우리는 목적도 없이 이유도 없이 둘만의 루트를 만들어가며 걸었다.
꼭 봐야 하는 것이 없으니 바쁠 일이 없다. 특히 치앙마이에서는 서두를 일이 없다. 도시 전체가 작고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마음만 먹으면 3,4일 안에 중요한 포인트는 보고도 남는다. 같은 거리를 여러 번 볼 수 있다.
바쁜 일도 없고 누가 채근하지도 않는다. 마음을 순하게 먹으니 발걸음이 훨씬 가볍다. 치망마이에 간다는 것은 바쁜 것에서 놓여나는 것이다. 돌아와 적어놓은 것을 보니 비용이 저녁 먹은 것 밖에 없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거리만 구경한 것이다. 돈 봉투 위에 지출할 때마다 간략히 써놓은 메모가 있는데 저녁, 간식이라고만 되어있다.
첫날은 아무 곳도 가지 않았다. 숙소 주변 반경 약 3km 내외에서 걸어다니기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양보다 조금만 넘치게 먹거나 비위가 안 맞는 걸 먹으면 체한다. 체기가 오래 가니 보통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다. 먹는 걸 좋아하지만 고통스러운 경험을 자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숟가락을 놓게 된다. 그런 내가 해외로 왔으니 음식에 대한 고민이 배가 된다. 안 맞는 낯선 음식에 손을 댔다가 탈이 날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그래도 아직 젊은 기운이 남아서인가 분위기 좋은 식당 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걸 보니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 ‘그래, 먹어보고 안 맞으면 남기지 뭐’ 용기를 내서 문을 연다. 앉아서 억양을 들어보니 놀랍게도 영어를 쓰는 사람과 중국어, 일본어를 쓰는 사람이 혼재되어있다. 놀랍다. 식당 하나에 전 세계 사람이 샘플로 다 들어있다.
이름도 모르고 사진만 보고 “이거,이거 주세요” 두 개를 주문한다. 밑에 영어로 작게 설명이 되어있기는 하다. 재료와 조리법은 나와 있지만 미세하게 들어가는 양념은 알 수 없고 그것들의 조합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 즐거운 식사 앞에서 걱정도 앞선다. 하나는 파인애플밥이다. 남편은 질색을 한다. 아니, 과일과 밥의 조합이라니, 너무 이상하지 않냐며 자기는 안 먹겠다고 한다. 나도 처음 먹어보는 거라 기대반, 걱정반이다. 와! 한입 먹어보니 놀이공원 온 듯 기분 좋은 맛이다. ‘달콤하고 감칠맛이 끝내준다’ 라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순례는 고통스럽게 돌아야 하는데 이런 기쁨도 있다니 할만하네. 낯선 도시가 갑자기 친근하게 다가왔다. 순례가 꼭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순례는 종교의 발생지나 의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방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빵지순례도 있고 역사순례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순례를 하면 되는 것이다. 길을 잃어도 좋은 곳, 길을 잃을 수 없는 곳, 여기는 치앙마이다. 치앙마이에 간다는 것은 순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