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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박용운 Feb 10. 2022

문학적 현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문학에는 ‘문학적 현실’이란 표현이 있다.

문학적 현실이란 실질적으로 현실을 직시하여, 이를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당겨야 한다는 말이다. 매우 복잡다단 複雜多端하게 움직이는 사회의 양상을 작품 하나에 담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사람들은 이미 현실 속에 몸을 담그고 있기에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적절하게 함축하여 글로 표현해야만 한다. 작품이 쉽고 흥미가 있어야 하고, 주제도 선명해야 한다. 특히 문학과 현실의 관계 속에서 불가분 不可分의 관계가 있다면 시 詩와 정치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난 4년이 넘는 시간을 혼돈의 시간을 보내왔다. 좌우 진영으로 나뉘어 분열과 혼란, 빈부와의 계층 간의 갈등은 이미 고질병이 되어 버렸다. 문명사회에서 원시사회로 귀화하는 무한 추락을 눈 뜨고 보면서, 손에는 식은땀이 멈추질 않았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권력이 부패하면 도리어 시 詩는 깨끗해진다“

권력이 사람을 교만하게 할 때, 시는 그의 한계를 일깨워 준다. 미국의 35대 존 F.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가지 않은 길’의 시로 유명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 1874~1963) 시인이 축시를 읽었다.

뉴 프런티어 정신을 앞세우던 젊은 케네디는 노시인을 통해 대중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얼마 후 (63, 1) 프로스트 시인이 89세로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는 도서관 건립 기공식에 참석한 케네디는 연설을 통해 취임식에 시인을 초대한 상징의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운명은 마치 드라마 각본처럼 연설을 마친지 불과 얼마 뒤, 암살범에 의해 총격에 쓰러져 그가 꾸던 꿈은 영구 미완의 이상으로 남고 말았다.


‘가지 않은 길’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피천득 번역)


(---그의 바탕에는 인간 정신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시와 권력을 결합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권력을 권력으로부터 구원하는 수단이 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인간을 오만으로 몰고 갈 때 시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 줍니다. 인간의 관심 영역을 좁힐 때, 시는 인간 존재의 풍요와 다양성을 일깨워 줍니다. 권력이 부패할 때 시는 정화해줍니다) - 케네디 연설문 중에서 -


젊은 케네디는 추구하는 이상의 정치에 시의 순수를 결합하고자 했다. 시와 정치는 다 같이 사회발전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믿었다. 정치는 사람을 이끌지만 쉽게 탐욕에 물든다. 권력은 더 많은 권력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타락의 길로 빠져든다.

시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근원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시의 순수의 힘은 인간을 가장 인간적인 상태로 복원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탐욕에 눈멀지만, 詩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저 빗나간 민주화 운동의 역사, 민주화로 치장하고 교묘하게 오랜 시간을 독버섯처럼 번지다 인제 와서는 정권마저 찬탈 簒奪 후 역대 어느 정권보다 더 권위주의와 오만한 독선을 멈추지 않고 있다. 문학은 급변하는 시대의 변곡점에서 정치 권력과 팽팽한 긴장 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을 말리고 타일러야 하거늘 이념과 정의를 앞세우고 스스로 권력의 편에 서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도 目睹하기도 한다. 순수성은 사라지고 혼탁한 정치에 동화되어 같은 무리가 되는 경우를 직접 보았다. 본질을 잃어버리고 권력의 달콤함에 순간 안주한 까닭일 것이다.


‘권력은 잠깐이지만 문학은 영원하다.’

시인 자신이 선택할 일이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동 시대인으로 양심과 본분에 얼마나 충실해지려 했는지는 훗날 밝혀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달랑 남겨진 한 장의 달력 속의 계절과 시간은ᆢ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더니 이제 한해의 막바지를 향해 잘도 흘러왔다. 이때쯤 되면 새해에 계획하고 소망했던 일 중 무언가 빠트린 것 같은 허전함에 머뭇거리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또 자구먼 돌아보게 된다.


삶을 잘 견디며 살았는지 이길 수는 없었지만, 견딜 수 있는 것이 세월이라고, 피할 수 없지만 맞설 수 있는 것이 운명이라고, 무언가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시간이 내 발걸음을 잡는다. 안 먹을 수 없지만 잘 먹을 수 있는 것이 나이라는데, 어차피 지나버린 시간 또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며 가름해 보지만, 나를 다잡지 못하고, 그저 스스로 위로해 보면 어떨는지.

자신을 존중한답시고 나는 잘났다 소리친 시절도, 자존감에 나는 소중하다. 인정받고 싶던 시간도 다 부질없다는 것을, 허전한 가슴으로 가질 수 없지만 지켜줄 수 있는 사랑을 함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또 한편으론 받을 수 없지만 보낼 수 있는 것이 그리움 아닌가. 지나간 수많은 사연은 이제 가슴 깊이 묻어두고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왕국으로 발맞추어 여행을 떠나야지 않겠는가. 놓을 수 있는 것이 욕심이라고, 잡으려 발버둥을 치지 말고 세월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 누가 내 삶을 만들어 주겠나? 내가 스스로 삶을 만들어 갈 뿐이지.


‘입보다는 귀를 높은 곳에 두라’라는 말처럼 만인에게 인자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고, 나서서 봉사하며, 좀 더 부드럽게 잘하고, 마음먹은 데로 그렇게 하고, 좀 더 참아주고, 그렇게 맞이하는 행복이란 가슴속에 사랑을 채움으로 오는 것이고, 신뢰와 희망으로부터 오고, 따뜻한 마음을 나눈대서 움이 트고 새싹이 자라는 것이다.

꽃에 향기가 있듯이 나에게도 품격이 있어야지 내가 먼저 상대를 존중하고 신뢰하고 배려하며 의연하게 정직한 행동을 하며 2021년을 잘 마무리 하면 안 되겠니? 용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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