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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ruvuru Sep 03. 2017

괴물 김 준 평, 모두의 아버지

영화 <피와 뼈>  / 최양일 감독

가운데 인물 - 김준평(기타노 다케시)

김 준 평. 나는 영화 <피와 뼈>를 본 지난 며칠간 그의 이름 석자를 잊지 못하고 있다. 김준평을 연기한 기타노 다케시의 강렬함에 놀라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피와 뼈>의 내용 자체가 갖는 선정적인 이미지에 홀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래저래 생각을 정리해보면, 꼭 이 같은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김준평이라는 영화 속 인물을 기억한다는 건 일련의 이야기에서 고립된 주인공 김준평을 기억하는 그런 단순한 인상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김준평이라는 개인이 아닌 김준평으로 대변될 수 있는 비슷한 사람들을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그리고 폭력. <피와 뼈>를 보면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두 단어다. 의미로 따지자면 굉장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를 경유해보면 사실 두 단어가 얼마나 각별한지 깨닫게 된다. 아주 밀접했다. 생각해보라. 가정에서의 권력은 늘 힘으로부터 나왔다. 물론 현재 가정의 구조를 생각했을 때, 물리적인 힘이 꼭 가정 내의 주도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가족은 관계에서 비롯되는 믿음과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태여 힘을 동력 삼지 않는다. 그러나 제 아무리 가족이 그러한 온건한 감정 아래에서 끈끈한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해도 힘이란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어렵다. 가정은 작은 공동체로서 지키는 대상으로 지칭된다. 그렇기에 공동체에 꼭 필요한 룰이 뒤따르기 마련이고 통제 역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힘에 당위를 부여하고 불행하게도 폭력까지 수반시킨다.

김준평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갖은 당위를 전부 끌어안은 인물이다. 그의 폭력은 도를 넘은 수준이다. 물론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는 교포 1세대로서 아주 불합리하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던 인물이다. 그가 휘두르는 폭력은 대개 당대 교포 가장들의 성격에서 비롯됐다. 당연히 쉽게 당대라는 말을 빌려와 일반화시키는 건 잘못된 일이다. 탁월하게도 이 영화 역시 섣부르게 일반화 노선을 타지 않는다. <피와 뼈>는 연민을 던지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김준평이라는 인물에 사사로운 시선을 던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주 단순한 방식인데 의미로서는 주효했다. 김준평을 괴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를 통해 당대 모든 가장들의 찌꺼기를 대변시킨다. 말 그대로 찌꺼기다. 못난 부분은 물론, 추악한 부분까지 전부 다 끌어안는다. 그렇게 모아 모아 괴물을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더 무서운 건 김준평이 괴물이 되고 나서다. 괴물이 된 그는 더 이상 당대의 각박한 삶을 등에 짊어지던 가장들만을 대변하지 않는다. 점점 커지더니, 그는 시대를 불문하여 모든 가장들의 대변까지 손을 뻗친다. 그가 갖는 잔인함, 폭력성, 여성 편력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까지. 이 같은 충동과 욕망은 가장으로서 또 남자로서 누구나가 한 번쯤 속으로 품어봤을 법한 추악한 생각들이다. 말 그대로 내재된 찌꺼기와 같다. 영화의 제목인 <피와 뼈>는 이렇게 생각했을 때, 찌꺼기라는 의미에서 적절한 제목으로 보인다.

쿠보즈카 요스케 주연 영화 <GO>

만약 그럼에도 <피와 뼈>를 시대와 강하게 연관시켜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의 좀 더 뒤의 배경이자 의미로서는 반대편에 서있는 쿠보즈카 요스케 주연의 영화 <GO>를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재일교포 이야기라는 점이 공통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GO>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건, 어찌 됐든 두 영화 모두 아버지 그리고 가장의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포 1세대 김준평이 폭력을 상징하는 가장이라면, <GO>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야마자키 츠토무(배우)는 1세대를 거쳐온 2세대다. 그는 김준평과 비슷한 시대를 거쳐왔지만 태도는 정반대다. 김준평 같은 가장의 본보기를 답습하지 않는다. 2세대의 행동으로 생각할 만하다. 그는 힘으로 관계를 굳히지 않고 교감으로 다가갈 줄 아는 인물이다. <GO>에서 아들의 국적 문제에 대해 아버지인 자신의 생각을 내비칠 때, 그가 아버지로서 지닌 태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김준평과는 많이 다르다.

김준평(기타노 다케시)과 그의 아들 타케시 역으로 출연한 오다기리 죠

<피와 뼈>에 대한 대다수의 감상이 김준평이라는 제 멋대로 인 이 인물이 얼마나 더 가혹해지고 불편해질 수 있는지 혹은 그가 갖은 신념이 얼마나 더 뻔뻔해질 수 있는지를 포커스 맞추고는 한다. 그리고 불행히도 김준평의 피를 이은 인물들이 맞는 비극에 대해 영화의 제목인 피와 뼈의 의미를 더해 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후술 한다. 극 중 인물들 간의 대화를 인용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단순히 더러운 피를 암시하기 위해 벌린 장황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와 뼈>는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도 이 세상 모든 가장들의 욕망을 모아서 말이다. 다만 그 그릇이 김준평이라는 개인일 뿐이다. 그렇기에 넘치고 흐를 수밖에 없다. 과하고 흉해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개인이 다 담기라고는 어려운 갖가지 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으니까 당연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안에 모든 가장들이 다 있다. 그래서 강렬하다. 개인이 꼭 개인이 아닌 것 같다. 김준평이 자꾸만 여러 명으로 보인다. 모두의 아버지가 아른거린다. 모든 아버지의 욕망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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