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혹성탈출 : 종의 전쟁> / 맷 리브스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났다. 무수한 이야기를 종횡한 끝에 맞이한 달콤한 안식 같은 죽음이었다. 거대한 서사시는 그의 인생을 마무리짓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혹성탈출>, 시저 더 그레이트의 죽음이었다.
유인원인 시저를 두고, 한 사람이라 칭해보았다. 그의 삶을 인생이라고 포장해보았다. 그가 결코 인간이 아님에도, 끝내 인간의 곁에 서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얼핏 들어보면 그럴듯한 상찬의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벼운 비아냥처럼 들릴 수도 있다. 제 아무리 그가 인간에 맞먹는 지능과 지혜가 있다 해도, 보통의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성탈출> 리부트 3부작이 마지막 조각을 끼워 맞춤으로서 확실해졌다. <혹성탈출>은 인간과 유인원의 다툼만을 그린 영화가 아니었다. 막연히 유인원의 탈을 쓴 인간과 인간의 탈을 쓴 유인원이 서로를 해하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모호한 경계 속에서 누가 인간으로 남을 것인지를 그려낸 영화였다. 시저야 말로 인간이었다.
3부작으로 이어지는 이 장대한 이야기가 시저의 인생을 기록한 그럴듯한 전기라는 것에 부정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영화를 봤다면). 그도 그럴게 시저의 생과 사가 전부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 이 이야기가 전기로 여겨질 만한 요소가 충분해서다. 시저는 내내 영웅처럼 그려졌고 끝내 영웅다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과거의 <혹성탈출> 5부작이 장대한 SF세계관을 구축하는데 힘을 기울였다면, 리부트 3부작은 조금 다른 셈이다. 세계관 형성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영웅의 일대기에 있었다. 이 영화가 시저로 시작해서 시저로 끝을 맺는 이유다. 전기가 아니라면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그럴듯한 영웅담의 홍수 속에서 리부트 3부작은 아주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그 영웅이 유인원이기 때문이다.
<혹성탈출>에서 유인원이 설정 이외에도 또 다른 기능을 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유인원은 설정인 동시에 비유다. <혹성탈출>은 단순히 원숭이가 지능을 갖게 되어 궐기하는 내용이 아니다. 비주류가 모종의 이유로 주류를 전복시키는 파격적인 비유에 가깝다. 3부작은 그런 존재들이 궐기하는 내용을 상중하로 나눈 셈이다. 1편은 궐기의 시작이었고, 2편은 그런 존재들이 집단을 형성하고 나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내부적인 오류였다. 3편은 2편을 봉합하는 동시에 어떤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자문이었다.
피 터지는 싸움과 혹독한 삶의 가시밭길에서 유인원의 리더 시저는 굴리고 또 굴려졌다. 우호적이었던 인간을 등져야 했으며, 동료인 코바와 대립을 해야 했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고통에 떨었다. 그는 더 영리하고 더 기민하고 더 포용할 줄 알았어도, 그 역시 나약한 개인에 불과했다. 희망을 놓기도 하고 분노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등 뒤에 짊어진 깜냥과 세상의 무심함을 저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크게 흔들리는 순간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우쳤다. 인간을 향해 처음으로 “NO”라고 외쳤을 때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기우뚱거리는 자신을 바로 잡았다. “NO”는 시저에게 있어 마법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라서가 아니다. 시저는 부정을 할 줄 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의견을 부정하거나 사안을 부정하는 속된 뜻이 아닌, 부정할 줄 안다는 뜻에서의 “NO”였다. 인간을 처음으로 등졌을 때나 코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신념을 바꿔야 했을 때처럼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을 부정할 줄 알았다. 분노에 사로잡힌 자신마저 부정하기도 했다. 스스로가 믿는 걸 밀고 나가기만 하는 리더가 아닌 반대되는 것까지 껴안을 줄 아는 깊고 너른 리더였던 것이다.
시저는 이상적인 리더로 보인다. 무리를 이끌고 번영시켰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까를 고민했던 리더라서다. 정해진 답이 없음에도 끝없이 문답하고 싸워왔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를 죽이는 것으로 무리의 번영을 도모했다. 자신의 희생과 맞바꿔 사랑하는 이들의 미래를 약속하려 한 것이다. 영화 속 시저의 몸은 온통 상처 투성이가 되어간다. 인간이 그를 때리고 상처 입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전부는 아니다. 자신을 내던져 입은 상처가 더 많다. 마치 모든 고통을 자신에게로 쏟겠다는 듯 투지를 불사른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점점 부서져 간다.
결국 시저는 죽는다. 리부트 3부작은 리더 시저의 죽음을 기해 이야기를 끝맺는다. 죽음으로 완결되는 이야기니까 리부트 3부작은 영웅담이 맞다. 시저는 영웅으로 남을 것이다. 과거의 <혹성탈출> 5부작에서 시저는 유인원들이 숭배하는 유일신으로 묘사된다. 리부트는 이미 완성된 영웅을 후술 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과거 5부작과의 연결고리로 이 시리즈를 봐야 하는 건 아니다. 포지션에 있어서야 <에일리언> 시리즈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과거를 다루는 <터미네이터 4>와 비슷할지 모르지만 <혹성탈출> 리부트 시리즈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루퍼트 와이어트가 1편인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을 맡았을 때만 하더라도 그럴 의도가 있어 보였다. 화성으로 떠난 이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맷 리브스가 맡은 이후에는 정작 이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
아마 그 이유는 맷 리브스가 언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이야기를 독립된 서사로 끝내고 싶은 감독의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이만한 매력적인 이야기도 없다. 유인원이 영웅이 될 수 있는 이야기라니. 그것도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서 말이다. 그 어떤 영화적인 은유와 비유가 빗발친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의 매력을 뒤집기는 힘들 것이다. 단순하지만 극명한 소재니까 당연하다. 더구나 맷 리브스는 증명했다. 매력적인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끝마쳤다. 끼워 맞추기 식이 될 수밖에 없는 원작 프리퀄의 운명을 영리하게 끝맺었다. 이는 훌륭한 사례로서 남을만하다. 또 그는 시저를 통해 인간의 개념을 전도시켜 보다 인간답고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곱씹게 만들었다. 이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고, 인간이 되지 못했던 시저의 아이러니를 영리하게 극복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시저야말로 그 누구보다 인간다운 존재였고, 시저야 말로 인간이지 않겠는가?, 라는 결론은 이상적인 영웅의 결핍과 그로 인한 인간의 상대적인 결핍마저 채워주는 따스한 마침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