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uruvuru Jul 08. 2018

영화 <4등>, 준호가 꼰대를 대하는 법

영화 <4등> / 정지우 감독

하루에 한 번은 꼭 ‘꼰대’란 말을 만난다. 상황은 다양하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하릴없이 TV를 보다가. 커뮤니티 스크롤을 내리다가. 등등등. 꼰대란 말을 굳이 찾아 나서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방금 제시한 3가지 행동을 반복하면 좋을 듯싶다. 운이 좋다면 하루에 수차례는 꼰대란 말을 마주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이 꼰대라면 그럴 필요 없이 주위의 말에 귀 기울여 보면 된다.


불과 몇 년 전에는…


꼰대란 말이 나오면 뒤에는 이런 탄식이 붙고는 한다. 주로 꼰대가 될 깜냥을 지닌 자들의 성토다. 이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과거엔 없던 꼰대가 현재에 와서 부쩍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맞다. 근래 들어 자주 느끼는 변화다. 몇 년 전만 해도 확실히 이렇게까지 보이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꼰대는 옛날에도 있었다. 아랫사람을 별의별 이유로 면박 주고 으스대는 속물들은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가리지 않고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꼰대를 대하는 방식이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표출되기 시작했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4등>의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대번에 떠올린 단어는 다름 아닌 ‘꼰대’였다. 영화 속에서 꼰대로 등장하는 코치 광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4등>을 통해 견주고 싶은 이야기는 꼰대 광수를 대하는 제자 준호의 태도다. 놀랍게도 준호는 그 어떤 어른들보다 꼰대를 대처하는데 능숙하고 영민하다. 게다가 지혜롭기까지 하다. 꼰대를 향한 탄식과 한탄 그리고 이를 당장에라도 면피하기에 급급한 우리 사회에 <4등>이 쥐어주는 교훈은 어쩌면 꼰대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4등>을 마냥 꼰대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해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등수에 관한 이야기로 비춰진다. 제목부터 4등이라 어쩔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영화를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등수에 포박되어 풀이된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4등>은 수영에 재능이 있음에도 4등에서 그치는 자식을 보고 복장이 터진 엄마의 갈등에서 시작된다. 평범한 갈등에서 출발하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드라마들이 끼어있어 우리 사회의 면면을 적나라하게 조명해준다. 이를테면 코치 광수의 국가대표 시절 이야기나 준호 엄마의 극성 그리고 훈육방식 등 다양하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이 모든 걸 4등의 오명을 씻어내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이를 상징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등수를 꺼내 든다. 처음에는 4등. 중간에는 2등. 결국은 1등.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일련의 등수 나열로 보면, <4등>은 양비론이다. 엄마가 묵시하고 코치가 강행한 때리는 훈육과 이에 분개한 아버지가 내놓은 느슨한 방관적 교육. 결국 이 모든 것이 틀렸기 때문이다. 준호는 자신 앞에 주어진 두 방법 사이에서 고민하다 제 3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1등으로 이끈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영화 <4등>을 기억하는데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 준호가 택한 제 3의 길은 분명 자신의 의사다. 하지만 준호가 내린 결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준호는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다. 특별한 비기 따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왜냐면 준호는 앞서 어른들이 제시했던 두 방법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준호는 코치의 때리는 훈육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혐오했고 대들기도 했다. 스스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나중에는 이런 악습이 잘못됨을 인지하고 벗어나지만, 분명한 건 이를 겪고 휘두르는 과정에서 준호는 전과 달리 수영에 진지하게 마주할 기회를 갖는다. 제까짓 수영이 뭐라고!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다. 참담한 시간이 이어졌지만 맞는 것을 통해 수영을 하는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었다. 뭣 때문에 맞아가며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잠들어있던 동기를 일깨우고 의의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4등>을 단순히 악습에서 벗어났더니 등수가 따라왔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면 조금 그렇다. 그 말은 즉, 악습을 휘두르는 꼰대의 그늘에서 벗어났더니 모든 게 잘 풀렸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준호의 깨달음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준호는 코치라는 꼰대를 벗어나서 잘된 게 아니다. 준호는 꼰대 코치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성장한 케이스다. 코치의 방법은 잘못됐지만 그의 이런 극단적인 훈육이 없었다면, 준호는 결코 수영을 진지하게 바라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4등>을 통해 깨우쳐야 할 사실은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눈 앞의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만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의 차이다.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멀리하기보다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고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준호는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코치를 미워했지만 한편으론 그의 말에 확신을 느꼈다. 존중하기도 했다. 그러한 차이다.

“넌 엄마만 없으면 1등 할 수 있다”라는 코치의 말은 기대를 등에 없고 물살을 가르던 준호의 짐을 덜어줬다. 그리고 엄마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수영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그리고 이로 인해 생겨난 의지는 한없이 증폭되어 1등이라는 상으로 준호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영화는 준호가 1등을 했다는 암시를 뒤로하고 끝난다. 자신이 1등을 했다는 사실에 전율하려는 대목에서 영화는 멈춘다. 그 뒤의 이야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이 이야기의 뒤가 있다면, 코치를 향한 준호의 생각은 어떨까? 준호는 코치를 미워할까? 코치를 싫어할까? 그게 아니면..?


준호의 생각과 뒷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준호는 코치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엄격함을 내세우며 저지른 코치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코치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거라 믿는다. 준호에게 있어 코치는 충분히 미워할만한 대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충분히 배워볼 만한 대상이기도 했다. 코치의 잘난 부분만을 훔치는 게 아니라 못난 부분에서도 깨닫기를 바랐다. 준호가 코치를 대한 태도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꼰대를 둘러싸고 항간에 가로 놓이는 수많은 시선의 기저에는 불안으로 가득하다. 꼰대로 취급되는 것의 두려움. 꼰대를 대하는 것의 두려움. 이 두려움들이 모여 불안을 조성하고 혐오로 이어진다. 그리고 혐오는 곧 배척으로 이어진다.


지금 표출되는 꼰대를 향한 태도들은 대체로 배척에 가깝다. 가능한 멀리하고 가능한 무시하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골자는 유연함이란 걸 강조한다. 부드럽게 꼰대를 받아치란 말이다. 마치 유도 한판승을 꾀어내라는 듯이. 뜨겁게 맞붙어 힘 겨루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영리해지자는 교훈이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어째선지 제대로 마주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준호는 광수에게 도망치고 달라붙기를 반복하며 기나 긴 힘 겨루기를 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진창이 될 정도로 박복한 경험이었지만 이로 인해 더할 나위 없는 자신과 확신을 얻었다. 준호가 앞으로도 잘 해낼 것이란 확신은 이 경험에서 기인한다. 그렇기에 준호가 겪은 이 경험은 귀중하다. 어저면 <4등>의 골자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준호의 태도 말이다. 준호는 피하지 않고 맞서 자신을 다듬는 자세를 취했다. 준호에게 꼰대는 우리가 아는 그 꼰대가 아니었다. 준호에게 꼰대는 그저 그런 단어일 뿐, 의미 따위는 없었다. 이 말로부터 자유로운 준호가 나는 조금 부러워졌다.


작가의 이전글 <버닝>의 희미한 웅변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