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이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다. 오전에 바리 공항에서 렌터카를 반납한 후 로마로 날아가 거기서 베이징으로 다시 인천으로 복귀. 집에 가는 날이다.
아침 식사로 한국에서 가져왔던 햇반과 컵밥, 볶음김치를 털기로 했다. 오기 전에는 이탈리아 음식이 입에 안 맞을까, 특히 유라가 먹는 걸로 힘들어할까 봐 기내용 캐리어에 한국 음식을 꽉꽉 담아 왔었는데, 싸 온 게 무색하게도 이탈리아 음식이 아주 잘 맞아서 컵밥이 꽤 남았다. 귀국할 때 짐을 최대한 줄이려 부지런히 먹었는데도 조금 남아 마지막 조식으로 깔끔하게 끝내기로 했다.
호스트와 왓츠앱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비대면 체크아웃을 했다. 쓰레기는 분리수거를 해서 요일별 정해진 배출 폐기물을 처리하고 일반쓰레기만 남았다. 한국에서 소량으로 가져왔던 샴푸, 린스, 바디워시가 떨어져서 근처 마트에서 가장 싼 걸로 샀던 것들이 꽤 남아서 결국 한국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거실, 침실, 화장실, 베란다를 싹 돌며 놓고 가는 게 없는지 확인했다. 깨끗했다. 방 열쇠도 식탁에 고이 올려놨다. 지낼 때는 각종 영수증과 과자봉지, 와인병, 손목시계, 컵 등 잡동사니로 가득했던 식탁에 덩그러니 열쇠 하나만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쓸쓸했다.
오후 1시에 출발하는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9시에 숙소에서 출발했다. 약 30분 거리의 바리 공항에 도착해서 며칠 전 차를 렌트했던 곳에서 반납을 진행했다. 어느 나이 지긋하신 직원이 차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을 했는데, 운전석 바퀴 휠에 흠집이 나있었다.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커브를 급하게 돌면서 흠집을 낸 듯했다. 아내와 나는 당황해서 처음 렌트할 때 녹화했던 차량 영상을 확인했다. 그런데 직원이 다가와서 걱정하지 말라고, 렌트할 때 슈퍼커버 보험으로 가입했기 때문에 별도의 요금은 없다고 안심시켰다. 맞다. 혹시나 해서 차량 렌트할 때 가장 비싼 슈퍼커버 보험을 옵션으로 선택했는데, 이게 지금 빛을 발하는구나. 한 달 전의 나, 특급 칭찬한다.
탑승을 기다리면서 맥주를 마셨다. 어차피 비행기에서 자야 하니까 낮부터 마셔도 상관없겠지. 라운지 옆의 통유리 너머로 바리 공항을 바라보며 맥주잔을 홀짝였다. 여유 있게 귀국 전날 로마로 복귀하여 다음날 인천행 비행기를 탈 수도 있었지만, 폴리냐노 아 마레에 하루라도 더 있고 싶어서 마지막 귀국하는 날 하루에 바리에서 로마, 로마에서 인천으로의 비행을 몰아넣었다. 라이언 에어가 연착도 잦고 최악의 경우 취소되는 경우도 많다고 들어서 걱정이 많았지만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연착 없이 일정대로 운항했다.
12시 45분. 비행기에 올라타며 마지막으로 바리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앞으로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 어디서나 하늘은 똑같은 얼굴이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어딘지 더 애틋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바리의 푸른 하늘을 눈에 담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하니 2시가 조금 넘었다. 로마에서 경유지인 베이징행 비행기가 밤 9시였다. 약 7시간의 시간이 남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로마 시내 땅 한 번 밟아볼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베이징행 비행기 체크인을 2시간 전에 한다고 치면 7시까지는 공항으로 돌아와야 한다.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로마 시내까지는 고속열차로 30분 남짓, 일반열차나 버스, 택시로는 1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여기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수하물을 찾고 이걸 다시 유료 보관시설에 맡기고 다시 택시를 타고(만약 기차를 탄다면 운행시간을 맞춰야 하고) 로마 시내로 가서 후딱 구경하고 다시 6시쯤엔 택시를 잡아서 공항으로 돌아와야 한다. 머리로만 동선을 짜도 복잡하고 돌발변수가 너무 많다. 어찌어찌 동선대로 움직여서 로마 시내로 간다고 해도 많아봐야 2시간 정도밖에 못 볼 것 같았다. 그렇게 짧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로마를 봐야 하나? 누구는 이탈리아까지 왔으니 로마 땅이라도 밟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봤을 땐 영 아니었다.
그리하여 우린 이탈리아까지 와서 로마를 안 갔다. 물론 로마 공항도 로마니까 아주 맞는 말은 아니지만, 사실 공항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니 로마를 갔다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물론 아쉬웠지만, 이렇게 뭔가 아쉬움을 남겨야 나중에 또 이탈리아에 올 빌미를 만들지 않을까 싶었다.
바리에서 로마로 도착 후 국내선 터미널에서 샌드위치와 빵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막상 로마 시내로 안 간다고 결정하니 공항에서의 시간이 너무 남았다. 유라는 패드로 저장해 온 영화들을 보고 아내와 나는 여행 동안 읽으려고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을 읽었다. 사실 여행 기간 동안 책을 많이 못 봐서 거의 첫 페이지였다. 난 그렇게 귀국날 공항에서 밀린 숙제 하듯이 책을 다 읽었다.
오후 5시쯤 국내선 터미널에서 국제선 터미널로 이동했다. 확실히 국제선이 규모가 훨씬 커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탑승수속을 하는데 다른 짐은 검색대에 무난하게 통과했지만 마테라에서 샀던 유라의 커다란 인형은 한 번에 통과하지 못했다. 아마 커다란 인형 안에 뭔가를 숨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더 세심하게 검사했다. 마테라에서 인형을 살 때 너무 커서 비행기에 같이 못 타면 어떡하냐고 유라를 놀렸었는데 실제로 인형이 통과를 못하자 우린 장난이 현실이 되는 건가 당황했다. 우리가 진짜 당황하니 유라는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직원들이 인형을 들어 보이며 너무 크다고 놀라는 척 웃으며 통과시키자 안심이 되었다. 검색대의 다른 사람들도 유라의 커다란 인형을 보며 웃음 지었다. 난 유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되찾은 인형을 꼭 껴안고 공항을 돌아다녔다.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다는 명품 가방 하나 없는 아내를 위해 면세점을 돌았다. 명품관에 입장(!)하려면 대기를 해야 한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매장 안이 너무 붐비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인 걸까. 아무튼 매장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 담당 직원이 왔다. 직원은 내가 안고 있는 유라의 인형을 보더니 인형이 무척 마음에 든다며 인형과 매장 내 가방을 바꾸자며 농담을 했다. 난 오케이라고 즉답했다.
아내는 마음에 드는 가방이 있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나왔다. 꼼꼼한 아내는 매장 앞 벤치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가방의 가격을 검색하며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봤다. 명품 가방 하나 마음 놓고 못 사는 아내가 안쓰럽고 미안해서 그냥 사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아내는 결국 매장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명품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내는 사무실 직원들이 하나같이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게 신기하다며 자기도 하나 살까 했었는데 "굳이" 이 돈 주고 살 거까진 아니라고 했다. 남편으로서 아내가 좋은 가방 하나 마음 놓고 못 사는 모습을 보는 건 좀 서글펐다. 내가 면세점을 돌며 여기저기 들어가 보자고 말했지만 정작 아내는 심드렁했다. 결국 아내보다 내가 더 아쉬운 마음을 안고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로마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은 올 때 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우리 모두 피곤했는지 기내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잠만 잤는데, 어느새 일어나 보니 베이징에 거의 다 와있었다.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에서 거의 6시간을 기다려야 해서 미리 라운지 이용권을 준비했다. 라운지는 크지 않았지만 커다란 소파와 라면, 간식, 맥주(!) 등 주전부리가 많아서 탑승 대기시간 동안 편히 쉴 수 있었다. 라운지에는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 혹은 우리처럼 어딘가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지친 얼굴과 몸짓으로 쉬고 있었다. 앞으로 겪을 여행의 설렘, 며칠 동안 겼었던 여행의 여운. 라운지 안에는 닮은 듯 다른 분위기와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도 며칠 전 이곳 베이징 공항에 여행의 기대와 설렘, 걱정을 안고 왔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아내가 휴대전화를 잃어버려서 크게 놀랐었지. 결국 비행기 좌석 사이에서 찾았지만. 불과 2주도 안 된 일이지만 마치 오래전 과거에 겪었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여행은 이렇게 우리의 시간감각을 뒤흔든다. 같은 24시간이지만 새로운 경험들로 꽉 찬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높은 밀도를 갖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시간도 훨씬 길게 느껴지는 것 같다.
베이징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유라는 자작 노랫말을 지으며 시간을 보냈다. 기내식을 먹고 이탈리아에서 사 온 인형들로 놀면서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인천에 도착했다. 10시간을 넘게 비행을 하다가 2시간 비행을 하니 짧게 느껴졌다.
밤 10시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운전하는 우리 차로 어둠이 깔린 도로를 달렸다. 한국에 오니 2주간의 여행이 벌써 아늑하고 꿈만 같았다. 우린 정말 꿈을 꾼 걸까. 공항을 등지고 달리자 마치 이탈리아가 등 뒤에 있는 것 같았다.
처음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유라를 학원에 보내고 학원 카페테리아에서 노트북으로 열심히 구글지도와 인터넷 카페, 유튜브를 뒤지며 동선을 짜고 숙소 예약을 하고 교통질서를 익히고 준비물을 메모하던 시간들. 동네 도서관에서 이탈리아 여행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관련된 책이라면 무조건 빌려서 공부했던 시간들. 어설픈 이탈리아어를 메모하며 조금이라도 이탈리아와 친해지려 노력했던 시간들.
그렇게 오랜 시간 준비하면서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이탈리아보다 훨씬 아름다웠던 이탈리아에서의 시간들 역시 떠올랐다.
처음 바닷속에 얼굴을 담갔을 때 맛봤던 바다의 짠내, 뜨거운 태양에 시커멓게 타버린 얼굴과 등, 항상 우리보다 앞서 헤엄치던 물고기들, 잔잔한 수면 위에 흩뿌려진 윤슬, 그 위에 등을 대고 둥둥 떠있을 때 귀를 간지럽히는 조용한 물결, 초코맛 젤라토가 잔뜩 묻은 유라의 얼굴, 그걸 닦았던 티슈,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미간을 찌푸리던 아내의 얼굴, 에스프레소 잔 바닥에 깔린 녹은 설탕, 아드리아해를 힘차게 가르며 나아가던 보트 위에서 흠뻑 맞은 파도, 그 위에 흐르던 존 폴 영의 노래, 오래된 성당에서 조심스레 속삭이던 목소리, 혼자 거닐던 폴리냐노 아 마레의 골목들, 거기서 본 얼굴들, 그 위에 맺힌 웃음들, 골목 어귀마다 고여있던 투명한 햇볕, 어느 길로 들어서든지 항상 골목 끝에서 날 기다리던 바다, 바위절벽에 부딪히던 하얀 포말, 고요한 아침 혼자 달리기를 하며 들었던 거칠지만 규칙적인 숨소리, 광장 계단에 나란히 앉아 빨대로 빈 모히또 컵을 호로록 마시는 소리, 매일 아침 고양이 토마스와 멍멍이 부기와 함께 산책하던 숙소 정원의 이슬 젖은 잔디, 그 위를 샌들로 걷다 보면 엄지발가락에 묻는 작은 풀 조각들, 밤에 혼자 베란다에서 마시던 차가운 맥주병에 맺힌 물방울, 그때 거실에 틀어놓은 TV에서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 노상 주차장에 오래 세웠던 차에 막 올라탔을 때의 뜨거운 열기, 우리도 모르게 샌들에 묻혀 온 해변의 모래, 토마토소스를 잔뜩 머금은 오레끼에떼, 우리밖에 없는 수영장에서 올려다본 저녁노을, 친절한 사람들, 우리를 보며 미소 짓던 낯선 이의 얼굴들,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손들, 미끄러운 바닷속을 조심하라며 주의를 주던 목소리, K팝을 좋아하던 소녀의 호기심과 천진함이 서린 커다랗고 푸른 눈, 늦은 밤 숙소로 가는 길 등에 업혀 잠든 유라가 내뱉는 따뜻한 숨, 유라를 재우고 아내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올려다본 밤하늘, 그 안의 달과 별, 우리가 함께 걷던 어두운 골목길에 드리운 그림자 셋.
우리가 만나고 경험하고 느끼던 모든 순간들, 그 순간들이 모인 시간들, 그 시간들이 모인 기억들.
언젠가, 기억이 추억으로 무르익을 때쯤 다시 이탈리아에 가길 소망한다.
집에 와서 짐을 정리하다가 가방에서 유라가 비행기에서 만든 노랫말을 적은 종이가 나왔다. 그 노랫말이 꼭 우리의 여행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밤새도록 네가 본 것을 찾느라 고생했었어.
그 끝에 빛을 따라가 보니 네가 본 것이 이거야.
이탈리아 남부여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