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부여행] 서먹함 깨는 데에는 고양이가 최고

by 홍윤표

동물원에서 숙소로 돌아와서 아내와 유라는 쉬고 나만 시내 산책을 나갔다. 저번에도 혼자 산책을 해서 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걷고 싶었지만 동물원 돌아다닌 게 힘들었는지 숙소로 오자마자 둘은 뻗어버렸다. 나도 쉴까 하다가 마지막 날이라는 게 너무 아쉬워서 혼자서라도 나가보자 싶었다.

폴리냐노 아 마레의 구시가지를 정처 없이 걸으며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날을 혼자 곱씹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돌길을 꾹꾹 내딛으며 발바닥으로 오래된 도시의 흔적을 묻히려 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뜨거운 늦오후 햇살을 잔뜩 머금은 이국의 공기를 몸속에 채워 넣으려 했다. 눈으로는 아드리아해의 푸르름과 낡은 건물의 벽돌 하나하나 각인하려 했고, 귀로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와 오가는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기쁨에 들뜬 목소리들을 채집하려 했다. 그렇게 온몸으로 이곳을, 이탈리아를 느껴보려 했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발로 딛는 곳마다, 귀에 들리는 것마다,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면 모두가 애틋하고 특별해진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특별해지는 순간. 아마 이런 게 여행이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은 라마 모나킬레 해변과 아드리아해의 풍경

아쉬움을 가득 안은채 숙소로 돌아와 베란다에서 먼바다를 보며 병맥주를 마셨다. 아내와 유라는 그때까지 숙소에서 쉬고 있었다. 나도 함께 조금 쉬다가 늦은 오후 저녁을 먹기 위해 슬슬 밖으로 나가자고 했지만 유라와 아내는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파에 누워 패드만 보는 유라와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씩 짜증이 일었다. 여기까지 와서 휴일 집에서 하는 짓을 똑같이 하고 있다니...... 계속 나가자고 재촉을 해도 미적거리던 유라가 "근데 별로 배 안 고프지 않아?"라며 항의하듯 되묻자 그만 화가 치밀고 말았다. "그럼 둘 다 방에만 있던지!" 그렇게 말하고 혼자 나갈 준비를 하자 그제야 아내가 유라를 재촉해서 밖으로 나갔다.

시내까지 걸어가면서 조금씩 화가 풀어지며 아까 화를 낸 게 조금 무안해졌다. 아내와 유라는 아직 나에게 화가 난 건지 별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숙소에만 틀어박혀 있을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온거람.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관광이 아닌 휴양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인 만큼 숙소에서 쉬고 싶을 땐 편하게 쉬는 게 맞았던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에게 화를 내는 건 좀 아니다 싶어 미안해졌다. 거기다 오늘은 이탈리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아니던가. 난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이런저런 말을 해봤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이탈리아에 와서 피자를 많이 안 먹어서 오늘은 마지막 만찬으로 피자를 먹기로 했다. 부르봉 다리에서 라마 모나킬레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던 피자 가게가 생각나 그리로 갔다. 이미 저녁 시간이 한창이라 자리가 없었다. 직원이 내 이름을 물어보고는 자리가 나면 불러주겠다고 했다. 한 5분 정도 기다리자 "미스터 홍!"이라며 직원이 날 불렀다. 우린 자리에 앉아 피자와 해산물 튀김을 시켰다. 아까 일로 조금 서먹해진 우린 거의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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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만찬. 아까 동물원에서 산 인형과 저녁을 같이 먹겠다고 유라가 인형을 들고 나왔다.

저녁을 먹고 밤산책을 할까 하다가 유라가 지쳐 보여서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마지막 밤을 이렇게 보내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아쉬움 없는 여행이 어디 있으랴.

숙소로 가는 길 광장에 매번 오가며 지나치기만 했던 바에서 마지막으로 칵테일을 마시기로 했다. 난 그동안 운전 때문에 아내가 마시는 것만 구경해야 했던 스피리츠 아페롤을 시켰고 아내는 에스프레소, 유라는 젤라토를 시켰다. 각자 이탈리아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먹고 싶은 혹은, 먹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그렇게 우린 말없이 각자의 앞에 놓인 것들을 마시고 먹으며 마지막 밤을 최대한 늦춰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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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해주는 스피리츠 아메로와 젤라또

별말 없이 음료와 젤라토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사이에 서먹함이 아직 남아 있는 채로 마지막 밤이 끝나가려 했다. 그때 골목길에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조그만 고양이였다. 그동안 첫 번째, 두 번째 숙소에서 모두 고양이와 지냈지만 이곳 폴리냐노 아 마레에서는 고양이를 한 마리도 못 봤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마지막 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고양이와 마주쳤다. 별 거 아닌 우연일 수 있지만 우린 이 우연이 마냥 신기했다. 우린 신나서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녀석은 우리가 와서 사진을 찍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줬다. "결국 마지막 숙소에서도 고양이를 봤네." 녀석 덕분에 서먹했던 분위기가 일순 깨졌다. 우린 이탈리아 하면 고양이 밖에 안 떠오르겠다며 웃었고, 고양이는 웃는 우리를 남기고 유유히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사이에 남겨졌던 서먹함도 같이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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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털을 가진 길고양이. 녀석 덕분에 서먹했던 공기가 일순 온화해졌다.

숙소로 돌아와 아내와 유라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동물원에서 돌아다녔던 게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다. 피곤한 가족들을 다그치고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게 또 한 번 미안했다. 유라에게 화낸 게 미안해서 잠든 아이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이는 아빠 속도 모르고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었다. 내일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빠!" 하며 안기겠지. 아이의 뒤끝 없는 무구함이 참 부럽다.

베란다에서 병맥주를 마시며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훑어봤다. 얼마 전 찍은 그 사진들이 마치 오래된 서랍에서 꺼낸 앨범 속 사진들처럼 느껴졌다. 각기 다른 매력의 이탈리아 도시들의 각기 다른 풍경들. 그 속에서 언제나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우리 가족.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의 긴장감이 그새 며칠 지냈다고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다. 한국에서 여행 준비를 할 때 점점 늘어나던 걱정거리들은 직접 이탈리아에 와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때 어설프게나마 준비를 했으니 현지에 와서도 크게 어려움이 없었던 걸 수도 있겠지만, 뭣도 모르고 겁부터 덜컥 먹었던 내가 지금 생각하니 너무 우스웠다. 그것조차 아주 먼 옛날이야기 같았다.

지난 여행의 사진들을 뒤척이며 유행 지난 노래 가사처럼, 이 밤의 끝을 잡고 최대한 밤이 지나가지 않길 바랐다. 무심하게도 하늘의 달과 별은 저물었다.

밤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도 가족 곁에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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