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소설] 머리카락

by 홍윤표

1.
또 머리카락이다. 화장실 배수구를 가득 채운 머리카락. 오래된 건물이라 배수가 잘 안된다곤 해도 이건 심하다. 예전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머리카락을 치우면 됐지만 요즘엔 하루 걸러 머리카락을 치워야 한다. 아직 30대 초반. 본격적인 탈모가 시작된 걸까.

2.
하수구 뚫는 데에 효과 좋다는 클리너 제품을 한 통 쏟아부어도 소용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머리를 감으면 여전히 화장실 바닥이 물바다가 된다. 물바다가 되면 머리카락뿐 아니라 녹, 찌꺼기 등 온갖 부유물들이 화장실 바닥을 떠다닌다. 아침마다 화장실 청소 하는 데만 30분이 걸린다. 건물은 오래됐지만 화장실 바닥은 공사를 새로 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타일이 새것이었다. 전 사람도 배수 때문에 꽤나 고생을 한 모양이다.

3.
9mm로 밀어주세요. 머리카락을 잘랐다. 머리카락이 문제라면 머리카락을 없애면 될 것이다. 친구들은 재입대하냐며 놀렸고 사무실에선 여자한테 차였냐고 물었다. 군대는 면제였고, 여자 친구는 전설 속의 생물체였다. 화장실이 너무 막혀서요. 도대체 얼마나 막히길래 머리를 다 자르냐고 물었다. 여러분 상상을 초월합니다. 진짜.

4.
놀라웠다. 배수구가 또 막혔다. 옷걸이를 펴서 배수구 깊숙이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어김없이 머리카락이 길게 엉켜 나왔다. 길었다. 내 머리가 이렇게 길었나. 내 머린 분명 9mm로 잘랐다. 이건 아무리 봐도 족히 10cm는 넘었다. 머리를 자르기 전에 빠졌던 머리카락이 아직도 남아있었던 것 같다.

5.
퇴근 후 화장실에 가보니 아침에 물바다인 상태 그대로였다. 부유물이 둥둥 떠다니는 물바다. 배수구에선 기다란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었다. 시커먼 머리카락 뭉치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인 것 마냥 수면 위를 이리저리 흐느적거렸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쉽게 빠지지 않았다. 손에 좀 더 힘을 주었지만 무리였다. 뭐지?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우두둑. 손에 기분 나쁜 촉감이 전달되면서 머리카락이 빠져나왔다. 머리카락은 거의 한 움큼이었고, 머리카락 끝자락에는 피 묻은 살점들이 덕지덕지 매달려있었다.

6.
전문업자를 불러 배관 내시경을 통해 배수구 내부를 살폈다. 작은 화면을 통해 내시경이 좁고 컴컴한 배관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렇게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던 중 갑자기 화면에 무언가 보였다. 머리카락과 머리카락과 머리카락. 그 사이에서 빠끔히 이쪽을 쳐다보는 눈이었다.

7.
경찰의 말은 이랬다. 내가 이 집에 이사 오기 전에 살던 남자가 자신의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 중인데, 토막 낸 시체 중 머리만 찾지 못했다. 이번에 우리 집 화장실에서 발견된 머리로 추궁을 하자 결국 그 남자는 실토했다고 한다. 머리를 토막 내고 화장실 바닥을 깨부숴 묻고 다시 새로 타일을 덮었다고 했다. 그리고 경찰은 찾아낸 머리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뜯겨 있었다고도 했다.

8.
그 뒤로 화장실 배수구가 더 이상 막히지 않는지는 잘 모른다. 그 일이 있어 얼마 후 바로 이사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화장실을 부유하던 머리카락은 그 여자가 토해내는 비명이나 절규 같은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아래 있다는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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