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마약중독자가 되었을 거다.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by 표시형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난 틀림없이 마약중독자가 되었을 거다.

사실 한국에서 태어나도 마약중독자가 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에 가서 마약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약중독자’가 되기 위해 미국까지 갈 수 있는 녀석이었다면, 지금 이런 인간이 되지도 않았을 꺼다. 적어도 이것 보단 훨씬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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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생활 97일 째의 아침, 이게 내 병원생활의 97%가 완료되었다는 말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던 찰나, ‘무표정’의 목소리가 날 일으켰다.


“어때, 오늘은 괜찮으세요? ”

재빨리 얼굴에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났다.


아침 회진을 도는 수십 혹은 수백 명의 환자들에게 했을 똑 같은 말 그리고 98일 동안 나에게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했던 말 , 처음에는 꽤나 듬직해 보였던 감정 없는 목소리와 표정이 이젠 지긋지긋했다.


‘내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니가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 내 발등을 네 번이나 찢어 난도질해놨으니 이 자식아,’라고 말할 용기는 역시 없다. (그랬다면 난 이미 마약중독자였겠지.)

난 그에게 공손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내 발등 속 상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내가 무례한 태도를 보인다면 유일한 목격자인 그의 머릿속에서 내 발등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네, 아픈 건 없어요 상태는 어떤가요?”


난 오랜 병실 생활이 몹시 힘들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명 돈을 지불하는 건 나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말을 쓰지 않는 걸 고맙게 여길 정도로 거만한 말투로 내 상처를 꾹꾹 눌러보며 말했다.


“이거, 상태가 안 좋은데요? 수술 한번 더해야 할 것 같네 이거”


그는 아직 동그라미 한번 못 그려 본 내 토요일 날 아침의 스케치북에 침을 뱉었다

하얗고 건조한 스케치북의 표면에, 누런색 가래침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날아와 철퍼덕하고 달라붙었다.


“네? 수술을 한번 더한다고요?” 막 잠에서 깨어 마른 내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그래야 될 것 같은데? 이거 이거 살색이 안 돌아오잖아, 보세요 여기”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내 입 냄새를 맡았나? 난 입을 막으며 상처를 바라보았다.


피부 이식한지 삼주가 지난 내 발등에는 시커먼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발등 한가운데서부터 엄지발가락 까지 길게 붙어 있는 시꺼먼 딱지들, 난 이것들이 모두 떨어지면 뽀얀 속살이 안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곤 했었다 바나나처럼.


“이렇게 눌어붙어있으면 안된다고요 여기가, 이거 이상하잖아요. 이럼 다시 해야 된다고”


아니 분명 어제까지는 다음주에 퇴원 준비하라고 얘기하며, 더 이상 말하기 귀찮다는 표정으로 제 할 말만 나갔던 이 사각 턱의 권위적인 의사는, 오늘 내 상처를 보며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건조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한 말투는, 순간 내 수술을 한 게 그라는 사실 조차 헷갈리게 만들었다.


안타깝다는 표정이나, 안됐다는 표정은 없다. 그의 목소리와 말투는 “도장 찍어주세요”를 말하는 마른 오징어 색깔의 피부를 가진 우리 집 앞 동사무소 9급 공무원의 무례한 태도와 다를게 없었다. 젠장 우리 아빠는 너한테 그 동사무소 직원의 3개월치 봉급을 너한테 주고 있다고.


“저.. 저” 내가 어버버거리는 사이,

‘무표정’은 이미 뒤돌아 섰고, 난 뒤돌아 나가는 그를 붙잡을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난 말을 삼켰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시계는 아침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침대 옆 휠체어에는 배달된 아침이 얹어져 식어가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봤다. 도대체 뭘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는 “신한정밀”에선 연기를 뿜어 대고 있었고, 그 옆으로 줄지어 다닥 다닥 달라붙어 있는 소규모 공장들이 자아내는 안쓰러운 분위기는 내 기분을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별 수가 없었다. 난 이불을 덮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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