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플과 매운 족발 매운 닭발 매운 떡볶이

그리고 무난한 인생

by 표시형

스냅백이 점령했어, 스냅백이 점령했다고. 난 과실 앞 4인용 벤치에 혼자 앉아서 내 눈 앞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스냅백을 경멸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BOY라고 써진 스냅백을 여자들은 GIRL이라고 써진 스냅백을 쓰고 다녔다. 난 소녀야! 난 소년! 간간이 HELLO도 보였다. 소년! 소녀! 안녕! 끔찍했다. 차라리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게 더 유용하지 않을까 하고 난 생각했다. 이름은 외관상으로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때 BOY 중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와, 오늘도 대박, 면상 못생긴 거 봐, 도균아 제발 그러고 다니지 말라고”


재혁이 형이었다. 짧은 체크 바지에 하얀색 버켄스탁을 신고 힙합 스타일의 널럴한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머리에는 BOY라고 써진 스냅백이 얹어져 있었다. BOY 젠장 망할 BOY.


“멋져, 오늘도 멋져 형은! 역시, 토 나오게 개성 없다고.” 난 웃으며 대꾸했다


재혁이 형은 학교에서 인기가 좋은 사람이었다. 팀플을 할 때 재혁이 형은 멋지게 여 후배를 챙기는 방법을 알았다. 다시 말해 적당한 타이밍에 커피를 사줄 줄 알았다. 무난하게 팀플을 진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교수님과 눈을 마주치며 웃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막차가 끊기기 전, 피피티에 그럴듯한 내용들을 채워 넣는 방법과 팀원 모두가 불만을 가지지 않을 정도의 과제 배분을 할 줄도 알았다.

물론 과 행사에 참여해 분위기를 띄우는 일은 그에겐 기본 옵션이었다.


“도균아, 넌 너무 개성 있어서 문제야. 바지가 그게 뭐냐, 할머니야? 몸빼바지를 입고 대학교에 오는 애가 어딧냐고, 니 여자친구가 뭐라고 안하디? 무난하게 좀 살아봐 , 무난하게. 인마 너무 못생겼잖아 지금.”


하지만 난 그와 같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잘 나간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매번 생각하곤 했다. 왜냐면, 그는 중간. 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진심이 없었다.


오직 “무난하게”만 있었다. “무난하게 하자.” 술자리에서 팀플에서 그는 언제나 “이 정도면 됐어 무난하게 하자”를 이야기했고, 그의 “무난론”에 사람들은 수긍했다. 아니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웃겼다. 매운 닭발 매운 족발 매운 떡볶이를 그렇게 먹어대면서 사람들은 인생에선 언제나 “무난하게”를 찾았다.


“형, 옷은. 멋져 보이려고 입는 게 아니야. 날 표현하는 거라고요. 이게 나다. 내가 추구하는 분위기다. 이걸 표현하는 거라고. 멋을 모르네 이 사람”


이번 주말엔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난 대꾸했다. 젠장, 마지막으로 깊게 들이쉰 담배연기가 역겨웠다.


“이 자식 입은 살았어 아주 그래서 니가 표현하는 너는 ‘외계인’이냐?” 재혁이 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야 팀플 준비는 좀 해왔냐? 오늘 빨리 끝내고 주말에 모이지 말자”

“네 형 근데 자료조사해보니..” 말을 잇기도 전에 재혁이 형은 담배를 끄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어? 수진이 왔네, 수진아! 여기야 여기~!” 멀리서 수진이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엔 “GIRL”을 얹은 채로였다.

“어~ 재혁오빠 오늘 나랑 커플이네? 역시 오빠 스타일을 좀 알아, 셀카 찍을래!”


BOY와 GIRL의 만남. 그리고 그 옆에 몸빼바지.

수진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린 후배였다. 작년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로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군대에 다녀오기 전, 신입생 수진이의 모습을 기억한다. 체크무늬 남방에 짧은 단발 머리를 한 강원도 소녀였다.

소주 두 잔을 마시더니 울기 시작했었다. 수능을 망쳤다는 게 그 이유였었다.


“오 잘 나왔다, 오빠 나 이거 카톡 프사해도 되지? 아 맞다 오빠, 여름방학 때 유럽 간다면서 내가 빠리 맛집 추천해줄까? 나 몽마르뜨 쪽에서 진짜 대박 분위기 있는데 갔었거든. 아 부럽다 오빠 나도 또 가고 싶다~”


BOY와 GIRL은 또 다시 30분가량 유럽여행을 떠났고. 그동안 몸빼바지는 담배를 두 까치 더 폈다. 그들의 유럽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2시간가량 팀플을 했다. BOY의 능숙한 지휘 아래 우린 ‘교수님이 좋아할 만한’ 마케팅 목적에 알맞은 몇 가지 프로모션들을 제안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테면 “칠성 사이다는 젊은 층에게 다소 오래된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젊은 층들이 많이 사용하는 인스타그램을 활용해 젊은 층에게 접근하자” 같은, 웃긴 소리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사실 ‘인스타그램’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였다.


“형, 이거 너무 뻔하잖아. 인스타그램을 쓴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 사람들이 팔로우 하게 만드는 게 훨씬 힘든데” 난 BOY에게 말했다.

BOY가 말했다. “야, 이 정도면 충분해 공모전도 아니고 무난하게 하자 교수님도 이 정도 바랄 거야”

GIRL이 말했다. “뭐가 문제야? 난 완전 대박 좋은 거 같은데?”

GIRL은 프랑스에 다녀온 뒤로 습관처럼 말하곤 했었다. ‘한국엔 디테일이 없어, 프랑스는 사람들이 얼마나 섬세한데’


사실 BOY는 맞는 말을 했다. 교수님에게 ‘인스타 그램’은 세련된 마케팅 툴이었다. 더 설명은 필요 없었다. 젊은 층에게 접근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스타그램”을 사용합니다! 충분했다. 난 더 이상 저항을 포기하고 스마트 폰을 쳐다봤다. 그래! SNS는 역시 위대해!



우린 팀플을 마치고 매운 족발에 소주 한잔을 하러 갔다. 소주병이 네 병쯤 쌓였을 때 수진이가 울었다. 한국에선 하고 싶은걸 할 수 없는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재혁이 형은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지, 무난하게 생각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라는 무난론으로 그녀를 달랬다. 그들은 다시 유럽여행을 떠났고, 그동안 난 머릿속으로 ‘팀플’을 교수님의 평가 때문이 아니라, 진지하게 해보는 건 왜 하고 싶은 일이 될 수 없는 걸까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수진이가 프랑스에서 팀플을 했다면 좀 더 하고 싶은 팀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결론 내렸다. 매운 족발은 더럽게 매웠다. 끔찍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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