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가서 넷플릭스나 볼까 했던 울적한 평일 블랙스완에서 28살 여자 개발자를 만났다. 우린 교대역에서 맥주 한잔을 했다.
#1. 블랙스완에서 만난 사람들 _ 28세 개발자(여)
- 퇴근길이었다. 요새 맘처럼 되는 일이 없었다. 친구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매일 죽는 소리만 하는 사람만큼 매력없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건 내 인간적 가치만 떨어트리는 행동임을, 충분히 그 짓거리를 한 뒤에야 나 몰래 모임을 가지는 친구들을 보고 깨달았다.
즐거운 술자리에 찬물 끼얹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아서, 그렇다고 나같이 우울한 상황의 친구와 만나서 같이 소주만 푸다 숙취만 남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나는, 허전한 마음을 뒤로 하고 역삼역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띵동" "역삼동등대님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때, 알림이 하나 떴다. 며칠전, 아무 생각없이 설치했던 직장인 친구 찾기 서비스 블랙스완에서 온 알람이었다.
프로필 사진 속 앳된 얼굴에 조금 안어울리는 오피스룩을 한 그녀는 개발자였다.
근 한달만에, 나에게 먼저 호기심을 보인 낯선 인류였다.
나를 먼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
근 1년 간 거의 없었던 경험이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감사함이었다.
왜 나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그게 사업적인 이유던, 이성적인 이유던, 커리어에 대한 관심이던 그런건 상관 없었다.
혹시 아는가, 어쩌면 오늘 그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내 삶이 달라질지..
우리는 앱을 통해 번호를 교환했고, 교대역 인근 맥줏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 그 분은 프로필 사진보다 훨씬 더 앳된 인상이었다. 좋은 지표를 찍으며 성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넘실 거리는 스타트업의 실무자가 가질 수 있는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앱으로 사람은 처음 만나보는데 되게 어색하네요"
그녀가 운을 땠다.
"안녕하세요. 사실 저도 그래요."
나는 거짓말을 쳤다. 이유는 모르겠다.
"저 열정에 기름붓기 정말 좋아했는데, 여기에 열기 대표님이 계시길래 명함 교환을 요청했어요"
"아 그래요?"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코로나가 끝나고 모처럼 10시가 넘어가도 자리를 계속할 수 있다는 편안함에 느린 템포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요새 자신의 고민, 회사의 방향성, 그 속에서 개인의 커리어적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창 개발자를 찾고 있던 나는, 점점 그녀의 마인드셋이 마음에 들었고 더군다나 한창 찾고 있던 프론트앤드 개발자라는 점에 끌렸다..
'혹시 우리 회사로..?'라는 생각이 들때쯤 나는 아차 싶었다.
그래 이런 것들이 나를 계속해서 망쳤다. 모든것을 사업으로 연결시키려는 마인드셋은 효과도 있었지만 휴식의 부재라는 점에서 내 체력을 갉아 먹곤 했었다.
머리를 비우고 다시 이런저런 대화에 집중했다.
왜 스타트업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도전하며 살지만 동시에 나이가 들며 느껴지는 현실감은 무엇인지, 협업하며 느껴지는 아쉬움은 무엇인지..
맥주가 소주로 변할 때쯤, 나는 점점 내 속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대학교 때 짧지만 창업에 도전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더욱 다행이었던것은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풀어내는 자리가 아닌 나 또한 충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 기분이 들었다는 점이다.
술에 취해 혼자 털어놓은 것 같은 기분은 다음날의 찝찝함으로 남는다. 그것이 없을 것 같았다.
열한시가 조금 넘었을 때쯤 우리는 막차 시간을 맞춰 일어났다.
강남에서 막차를 놓치면 새벽 2시까지 택시가 잡히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때까지 않아있기엔 부담스러운 화요일이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로 지내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날 나는 모처럼 푹잤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참 오랜만에,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내 상황과 고민들을 이해 받았다.
동시에 그녀 또한 나와 같은 기분인듯 싶었다.
이성적 관계도 , 사업적 관계도 아니었다.
오히려 목적성 없는 서로를 공감하고 각자의 꿈을 귀기울여 듣는 관계
이런 것이 어쩌면 내 공허한 인간관계 사이에 비어있던 퍼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을 보냈다.
이성적 관계를 만들고 싶다는 말로 오해 받고 싶지 않아서 조금 고민했다.
"우리 다음번엔 블랙스완에서 같이 모임 만들어볼래요?"
1분이 채 되지 않아 답신이 왔다.
"너무 좋아요! 오늘 출근해서 안그래도 회사사람들한테 블랙스완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어떤 모임 주제가 좋을까요?"
때마침 지하철은 한강변을 넘어가고 있었다. 항상 머리통을 처박고 넘어가던 다리였다.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한강은 넘실거리며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생경한 감정이었다. 아주 작은 시간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까지 기분이 달라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