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노트북
퇴근 하는 길, 갑자기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내 낡은 노트북이 눈에 밟혔다.
동대문에서 산 빈티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접촉 불량인지 키보드를 조금만 세게 쳐도 꺼지는.
바탕화면은 온갖 아이콘들로 가득차서 지저분하고, 단점을 꼽자면 끝날일 없는, 스무살 때 이모가 사준 내 노트북. 이 기곗덩어리가 뭐라고, 갑자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집으로 챙겨왔다. 조심스럽게 켜고, 일기를 써보는데, 손에 익는 이 감이 익숙하다. 생각해보면, 이 녀석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스무살 때부터 줄곧 내 한심한 학교과제는 이놈과 함께 만들어졌고, 친구들과 네이트온도, 밤을 지새며 했던 게임도 모두 이 녀석과 함께했었다. 열기 컨텐츠를 한 개 두개 만들어 업로드 하고, 고쳐나가고 사업계획서를 쓰고, 정보를 찾고 함께 제법 큰 꿈을 꿨었다.
크고 무거워서, 가방에 넣고 다닐때마다 어꺠가 아팠고 이년 전부터 배터리는 다 닳아서, 코드를 꽂고 쓰지 않으면 10분도 버티지 못하는 이녀석을. 난 참 요긴하게 잘도 썼다.
새로 산 데스크탑 컴퓨터는 단 1초의 버벅거림도 없고, 짱짱한 모니터는 생생한 화면을 보여주는데.
지금 이 시간, 이 노트북으로 사소한 일기 몇 글자 치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꺼질까봐 조마조마 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다. 생각해보면 나중에는, 연필에 글씨를 썼던 질감을 그리워 하는 것 처럼, 이렇게 낡은 노트북으로 키보드 쳤던 그 감각이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오늘 하루를 회상한다.
여자친구를 만났고 여자친구가 울었다. 책 한 권을 읽었고 독서의 즐거움을 느꼈다. 독서 모임을 가졌고, 내 친동생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아구찜을 먹었고, 밥까지 비벼 먹었다.
그러곤 찬공기를 맞으며 집에 오는길, 여자친구와 전화통화를 했다. 며칠 전, 지나가다 지현이가 입으면 너무 예쁠것 같은 옷 한벌을 발견했다. 사실, 요새는 구제도 가격이 제법 나가는터라 조금 조심스럽게 가격부터 물었었다. 다행히 비싸지 않은 가격이었고 기분 좋게 새빨간 코트 한벌을 들고 사무실에 왔었다.
오랜시간 건네주지 못했고, 입은 모습이 이뻐 기뻤었다. 그래서 괜히 뿌듯해서 이렇게 물었다.
'엄마가 뭐라셔?' 그랬더니 지현이가 하는 말이. '요새 엄마가 오빠 싫어해' 였다. 오죽 나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으면, 어머니께서도 그걸 알고 이야기를 하셨을까 싶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께서 딸래미가 매일 밤잠 못이루는 모습에 내가 미웠나 싶었다.
이윽고 하는 말이. '엄마가 얘는 매일 내 딸한테 구제만 준다고 그래.'
생각해보니 그렇다. 지현이랑 같이 옷을 사러 지금까지 구제옷가게 밖에 안가봤다. 매일 함께 오천원 칠천원짜리 옷을 집고 입으면서 선물주곤 했었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맥주 한캔을 샀다. 얼굴이 금방 벌개지더니, 졸음이 몰려오다.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다.
일하는 글 말고, 일과 관련된 글 말고 솔직한 내 마음을 적은 글을 적은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나서 시 한편을 썼다.
나이를 먹는다.
밥을 먹는 것도 아니고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는다.
먹을 때는 몰랐는데.
먹다 보니 실수로, 이것 저것 참 많이도 먹었다.
진심 어린 친구의 말을 먹었고
걱정하는 엄마 말을 먹었고
시간 가는줄 모르고 술도 먹었다.
그렇게 혼자 앉아 맥주 한캔 먹다 문득. 벌게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
아무것도 모르고 먹다보니.
나이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