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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Feb 14. 2022

패스트푸드로 표상된 대한민국

#햄버거

[주간자유] 2022. 02월 주제1 #햄버거

왜 우리는 햄버거와 라면에 분노 하는가





우리는 2015년에 ‘맥도날드에서 사는 노숙자’라는 뉴스를 보았고, 2016년도에는 먹지 못한 컵라면을 유품으로 남긴 비정규직 구의역 김 군 사고에 분노했고, 2020년에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침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에 경악했으며, 작년의 토마토에 이어 2021년에 양상추 수급이 어렵다는 패스트푸드점의 공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세 개의 사건에 공통점이 무엇일까? 



공통점은 패스트푸드가 현재 극단으로 치닫는 현실의 폐단을 단번에 보여주는 표상으로서 작용한다는 점이다. 전후 산업화와 함께 등장한 패스트푸드는 대중들과 가장 친밀한 위치에서 사회의 단면을 비춘다.      



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정한 질의 상품을 대량생산 할 수 있으며, 빠르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유로 패스트푸드 햄버거는 1950년대 미국의 상징적인 음식이 되었다. 신선도가 중요한 음식을 대량생산 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 기술의 발달이 기반이 되었고, 간단하고 빠른 한 끼의 식사가 필요했던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이 ‘노동력’이 되었듯이 식량은 ‘상품’이 되었다. 자본주의의 기본 규칙에 따라 산업화된 패스트푸드점은 ‘싸고, 간단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식사’를 제공하며 대중화에 성공했다. 


식사의 질보다 칼로리라는 수치에 집중하며 신속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익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돼지고기 패티를 제외하고 소고기 패티로 정착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시간과 노동력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바라보는 자본주의의 철학이 먹는 시간에도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였고 우리는 음식에서 가성비를 찾아 헤매고 있다. 이러한 효율성을 외치기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왜 ‘빠른’ 음식이 필요했을까? 왜 식사의 고급화가 아닌 단순화 정책이 대중화되었는가? 그리고 왜 그런 음식이 노동자를 대표하고 현실을 표상하게 되었을까?          




2. 


‘7년째 패스트푸드점에 사는 노숙자 A씨’ 그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산 과자와 콜라로 하루를 때운다. 길거리의 남성 노숙인보다 더한 위험에 처한 여성 노숙인 A씨에게는 24시간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이야 말로 그 어디보다 안전한 ‘거주 공간’이 된다. 


생리대 대신 맥도날드의 휴지를, 비누 대신 롯데리아 세면대의 손 세정제로 몸을 씻는 여성 노숙인은 코로나 때문에 영업시간이 제한되자 길거리로 쫓겨난다. 남성 노숙인으로 가득한 노숙인 쉼터는 길거리만큼이나 위험하고, 여성노숙인 쉼터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능력주의를 선망한다. 좋은 학벌의 사람들이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낮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은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가난은 개인의 죄가 된다. 누가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가? 이 질문에서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인서울, 흔히 말하는 명문대 재학생 중 고소득자 자녀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이미 2000년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노력을 요구하는 사회에 사람들은 ‘노오력’까지 가져다 바치지만 쉽지 않다. 같지 않은 출발선에서 시작된 달리기 경주의 결과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당한 능력주의라는 것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는 세 가지 명제가 성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세 가지 명제가 성립하기는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능력주의를 신봉하면 할수록 복지와 연대의 가치는 사라지고, 낮은 임금으로 힘들어 하고 파산에 이르는 노동자들과 스스로를 타자화하게 된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긍정하게 되는 파국적인 신념이 정의인 마냥 떠오르고, 자신의 성공을 오직 스스로의 노력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신념이 넘실대는 사회에서 노숙자는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하는가》에서는 “노동력 상품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쏟아 붓는 과정에서 ‘노력’은 윤리와 신념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렸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 대한 비난은 마치 인간성에 대한 심문처럼 되어버렸다.”라고 말한다. 


타자화된 가난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우리는 길거리의 노숙자보다 아사 직전의 아프리카 아동의 후원광고를 더 많이 보게 된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 사이, 우리의 삶이 의도적으로 지워내고 있는 쪽은 어디일까, 질문의 답은 명확하다. 


신자유주의의 폐단이 가득한 사회에서 가난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가난은 사회구조의 문제이다. 어느 날 갑자기 부당해고를 당하고, 어느 날 갑자기 주거시설을 철거한다는 국가의 명령이 내려오면 우리는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 이건 우리의 피부로 와 닿는 문제이다.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외면한다면, 다음은 자신의 차례일지도 모른다. 오직 가난이 나의 능력의 부재 때문이라면 도움의 손을 뻗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3.


2016년 5월,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청년 노동자가 열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인력 부족이라는 이유로 2인 1조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을 홀로 처리했고 진입하는 열차를 발견하지 못해 벌어진 사고였다. 사람들은 그의 가방 안 컵라면 1개를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안전규칙도 지키지 못할 인력을 부리면서 제대로 된 임금도 제공하지 않았다. 책임은 기업과 하청업체 사이를 탁구공처럼 왕복했다. 이와 같은 노동자의 사망사건에 국회의원들은 앞다투어 중대재해처벌법을 입법했다.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인재였다.”라고 말했다. 만약 중대재해처벌법이 이미 존재했다면 이 인재는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명 유튜버의 스태프 노동착취 문제가 떠오르고 있다. 근로기준법과 노동법, 저작권 관련 법률도 이미 제정되어 있음에도 고용주에 의한 노동착취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스태프들이 10시간 이상의 강한 노동 강도를 견디고 받은 한 달 월급은 30만원 안팎이었다. 임금에 관해서는 고용주인 유튜버와 제대로 된 합의를 할 수도 없었다. 유튜버가 당신들이 손해배상을 할 수 있냐는 말로 고용계약서 혹은 용역계약서를 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두고 대중들은 말도 안 되는 임금에 분노하며 ‘라면만 먹고도 못 사는 월급이다’라고 화를 낸다. 여기서 한국 사회의 대표 패스트푸드인 라면은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진 걸까?     


라면은 노동자인 서민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자본가에게 잉여가치를 안겨 주려고 자신의 몫보다 더한 노동을 하고 지친 상태로 건강과 영양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배고픔만 사라지게 하는 아주 저렴하고 간단한 한 끼이다. 


한국의 라면은 박정희 정부의 혼분식 소비 권장정책으로 인해 대중화되었다. 그러니 정부가 나서서 유행시킨 음식이다. 박정희 정부는 쌀 생산량 부족으로 쌀값 상승을 두려워하며 혼분식을 장려하였다. 당시 그의 수출주도정책은 낮은 생산비용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졌고 이는 극단적인 저임금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낮은 임금으로도 생활할 수 있도록 정부는 쌀값 하락을 유도했고, 이는 농업 노동자들의 몰락으로까지 이어져 1차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수 감소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쌀 생산량으로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고, 낮은 임금을 유지해야했기에 시작된 혼분식 소비 권장은, 의도적으로 라면을 대중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층에 의도된 유행인 라면의 목적은 싼 값으로 노동자들이 고강도 노동을 할 수 있을 만큼 포만감을 주어야 했을 것이다. 이 목적은 그대로 내려와 현재까지 노동자들의 음식, 즉 서민의 음식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라면만 먹고 사는 삶이란, 아주 낮은 질적인 삶과 높지 않은 임금수준을 내포한다. 이는 삼각 김밥 등으로 변주되어 사용되곤 하지만, 미국엔 햄버거가 있다면 한국엔 라면이 존재한다고 말할 만큼 여전히 대표성을 가진다.   

   

여기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시사항을 보자.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 그러니 저 지시사항은 이렇게 해석된다. 높은 노동 강도로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아주 질 낮은 삶을 유도해야 한다고. 그 이유는 하나다. 자신들의 적폐에, 정치인들의 부조리에 신경 쓰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신히 목숨만을 연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대중은 우민화되고 손쉽게 정치인의 선전에 넘어간다. 다각도의 독해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TV와 같은 매스 미디어의 문장을 똑같이 믿는다. 그런 정부는 조금씩 공공의 영역을 사적인 영역으로 변모시키며 금세 국가를 개인 소유화한다. 왜 우리는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서 라면을 먹는지, 재벌이 라면을 언제 처음 먹었는지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가?


다들 알고 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라면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우리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라면만 먹는 삶에 분노하고, 라면밖에 먹지 못할 임금에 분노하고, 라면조차 먹지 못한 노동자의 삶에 분노한다.

          



4.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원론으로 산업사회의 근간인 신화를 창조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기계와 같다고 보았으며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면 소리가 나듯, 동물을 때리면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나와 타자를 구분하여,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제국주의의 시혜적 태도로 그들을 억압하며 발전시켜주고 있다는 독단적인 사고를 공고히 해주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태도는 끊어지지 않고 산업사회로 넘어왔다. 인간은 자연 또한 정복해야할 존재로 보았고 그로부터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무지막지한 파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금 와서야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주류 사상과 함께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문제가 드디어 수면 밖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초등학생일 시절 기후위기의 피해를 걱정하는 일은 저 너머의 북극곰의 문제이었으나, 이제는  나와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북극곰이 지낼 빙하나 북극곰의 사냥감 뿐 아니라 우리 식탁의 식재료가 없어졌다.


 재작년 햄버거에 갑자기 토마토가 사라졌고 작년에는 양상추까지 사라졌다. 토마토 없는 햄버거, 양상추 없는 햄버거라니.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들은 저마다 음료쿠폰과 할인쿠폰을 뿌렸으나 마카롱 햄버거라는 분노한 소비자들의 조롱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원인은 누구의 탓이 되어야 할까?     


토마토와 양상추의 수급 부족의 이유는 모두 작황 부진이다. 이는 실제로 수급할 물건 자체가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이 시기 소매점의 채소가격은 천장을 모르고 올랐고 대파가 금파가 되어 대파를 키우는 사람들도 생겼었다. 


토마토의 작황 부진의 원인은 너무 길어진 장마, 양상추의 작황 부진은 가을에 느닷없이 시작된 장마였다. 그리고 이 기후변화의 원인은 지구온난화다. 그러나 토마토는 금세 돌아왔고, 이제 양상추까지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전의 경험으로 ‘다시 무언가가 사라질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사라질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겨울딸기 값이 급등하고 있고, 일부에서는 이제 딸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까지 심심찮게 등장한다. 게다가 지구온난화 때문에 생두의 가격이 오르고 있어 스타벅스를 시작으로 여러 카페들이 커피 값을 올리는 추세다. 


개발중심주의로 인한 결과는 아주 늦게 나타났다. 과학자들은 이미 입을 모아 늦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한국은 과연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또 올해 무엇이 빠진 햄버거를 먹게 될 것인가? 

그건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 지점에서 기후위기의 재앙이 무서워지는 것이다. 



          

5. 


코로나라는 전염병의 창궐은 세계의 모든 생활습관을 바꾸어놓았다. 비대면으로 일상을 전환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 물리적인 거리두기를 종용하였다. 정부의 규칙에 대한 반발은 이성적으로 혹은 비이성적으로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분출되었고 사람들은 모든 지점에서 양극단으로 분리되었다. 2022년 대한민국 대선은 누가 더 여성을 혐오하는가 겨루기를 하는 것 같고 팬데믹 상황에서 발생한 분노의 방향은 약자를 향해 쏟아지고 있다. 


근로소득의 가치가 추락하는 반면 불로소득의 가치는 우러러보지도 못할 만큼 상향하고 있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돈을 선망하고, 그 선망을 감출 줄도 모른다. 젊은 여성의 추락을 리얼리티 쇼처럼 즐기는 사람들은 다른 약자를 향해서도 악의를 멈추지 않는다. 


공정의 정의는 나를 배제시키고, 노동의 위협은 나를 사지로 몰아가며 기후위기는 내 앞의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지워간다. 그러나 옳은 것이 정의가 아닌 시기에도 사람들은 햄버거와 라면을 보고 분노한다. 분노할 줄 아는 마음까지 잃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혐오의 공동체가 회귀해야할 곳은 어디인가? 


패스트푸드는 빠르고 간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빠르고 간편한 것에 분노해야 한다. 빠르기 위해 배제된 사람들을 살피고, 간편하기 위해 지워진 사람들을 돌본다. 


라면만 먹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야채 빠진 햄버거를 먹지 않기 위해서, 집이 없어 패스트푸드점에서 사는 사람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황정은 작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존재인 앨리스씨는 지하철 안에서 ‘눈의 흰자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씨발됨’이었다. 동공으로 정확히 응시되는 정면상이 아닌, 언제나 배경으로 흐려진 채로 흰 점막에 달라붙어지는 것.      


회귀해야할 곳은 바로 그 곳에 있다. 타인을 배제하지 않고 응시하는 것. 

    

신자유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증명되었다.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살아남으면, 나만 성공하면 돼' 로 흐르는 사고는 팬데믹 상황에서 재앙적이다. 신자유주의가 잡아먹은 연대의 가치를 끌어올 시간이 왔다.      


올바른 응시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 남을 위해야 한다. 사실 의도는 어찌되었던 좋다. 모든 것은 남을 위하는 공감에서 시작한다. 모두 나일 수 있다는 공감. 감응한 타자는 우리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야 한다.













· 참고문헌

1. 중앙일보(2016.11.23.), “패스트푸드의 역사를 살펴본다”.

2. 중앙시사메거진(2021.02.17.), “[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3)] 미식(美食) 레스토랑 vs 패스트푸드 체인점”.

3. MBN(2015.10.28.), “‘리얼스토리 눈’ 7년째 패스트푸드점에서 사는 85세 할머니…‘왜?’”.

4.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5. 조문영, 『우리는 어떻게 가난을 외면하는가』, 21세기북스, 2019.

6. 매일노동뉴스(2021.07.02.), “[구의역 김군은] 한 달 160만원 받고 홀로 작업하다 목숨 잃어”.

7. 매일경제(2021.11.13.), “[정혁훈의 아그리젠토] 양상추 파동이 남긴 것”.

8.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 문학동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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