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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Feb 28. 2022

장르 속 여성의 욕망 들여다보기

#욕망

[주간자유] 2022. 02월 주제 2 #욕망 

사회에서 여자의 욕망이 용인될 수 있는가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 인간을 기본 단위로 설정하여 경제를 단순화시켜 설명한다. 경제적 인간은 결정에 관련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을 내리는 존재다.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경제적 인간의 근간은 ‘욕망’이다. 내가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원한다는 욕구, 그곳에서부터 사람 간의 상호관계가 시작된다.


케인즈는 경제가 발전하여 모든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는 사회가 온다면, 경제 분야는 소수의 경제학자만 필요하며 경제적 인간이 잃어버린 가치를 누리며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공정히 소득이 분배되고 평등한 사회가 오게 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케인즈의 생각과 정반대로 흘렀다. 수량화, 정량화할 수 없는 가치들이 수로 잘게 나누어졌고 분해되었으며, 비교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수치로 변환되었다. 그러니 인간의 욕망조차 수치화되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수치화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존재 여부조차 인정받지 못했으며, 한 번도 사회에서 당당히 표현조차 될 수 없었던 여성들의 욕망이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의 저자 카트리네 마르살은 경제적 인간에 속한 특성들은 보통 사회에서 ‘남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치들이며, 경제적 인간에게 속하지 못한 특성들은 사회가 ‘여성적’으로 판단하는 특성, 즉 감정, 의존, 동정, 사랑, 사회에서 지친 남성을 향한 ‘돌봄등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두 종류의 특성이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시작된다. 가장 합리적인 주체이자 생산과 소비의 중심인 경제적 인간이 가진 특징들에게 우위가 생기, 그에게 존재하지 않은 가치는 위상을 잃는다. 현재까지 가정 내의 돌봄노동을 전담하는 전업주부들의 노동력의 가치는 수치화되지 못했다. 그들이 향하는 ‘돌봄’이라는 것은 여성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임무마냥 그려졌다. 그건 당연한 일이니 분석할 가치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분석하는 경제적 인간에 여성은 없었다. 그러니 여성에겐 욕망이 없었다.


아.

그럼에도 사회는 ‘감사하게도’ 여성에게 몇 가지 욕망을 허락해주었다.     

      



1. 사회가 허락한 여성의 욕망 - 모성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허락된 욕망은 모성이다. 오로지 모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욕구만을 지닌 인물만이 여러 콘텐츠 안에서 재생산되었다. 모성애는 스스로 낳은 자식에게만 작용하지 않았다. 여성이 행하는 돌봄은 미래의 자식을 위한, 준비된 ‘여자’의 모성애로 읽혔다.  

   

한국 스릴러 장르로 가보자. 과거 스릴러 장르의 영화에서 여성은 욕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욕망을 보여주기도 전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감독과 작가가 여자들을 죽였으면, 그들에게는 이름도 붙었다. ‘냉장고 속의 여자들’이라는 이름이. 수많은 여자들이 남자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 죽었다.


 한국 스릴러 영화에서 언제 여자들이 ‘모성’이라도 가질 수 있었느냐 묻는다면 1997년 외환위기 시대로 돌아간다.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가족단위가 크게 휘청거린 이후 수동적으로 살해당한 여성들은 ‘모성’을 지닌 채로 스크린에 재등장했다. 그들이 여성을 앞세운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이 유일하게 욕망할 수 있던 가족의 울타리가 스릴러 속 범인으로 인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그 영화는 “가족 이데올로기와 모성 신화”를 이용하여 가족의 결합을 꿈꾼다.(박미영, 2020) 모성의 새로운 소환은 스릴러 영화의 범인들이 여성 주인공의 자식 혹은 가족을 죽이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자신이 죽기도 한다. 여성 주인공이 서사를 이끌어갈 힘을 얻는 계기는 모성이다. 죽은 자식을 위한 복수의 마음으로 주인공은 사회의 규율에서 벗어난다. 여성 주인공은 죽은 자식을 안고 울부짖는다. 아이의 손은 힘없이 밑으로 떨어지고,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오열, 극장 안 사람들은 본격적인 영화의 시작을 기다린다.      


모성만이 허락된 여성 주인공의 스릴러는 남자와 어떻게 다를까? 이런 주인공은 절대 악하지 않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생전 처음 듣는 병명들을 달고 나오는 남자 인물들은 오직 부정한 욕망만을 가지거나, 애초에 아무런 욕망이 존재하지 않거나 하는 등 아주 다양한 모양을 그린다. 그러나 여성 주인공의 스릴러는 대부분 가해자에게 행해지는 “정당방위적” 가해가 주가 된다.(배유리, 2016) 여성은 함부로 다른 이들을 죽일 ‘욕망’을 품을 수 없다. 오직 먼저 가해자가 여성의 자식(혹은 여성이 모성애로 품은 다른 인물)을 죽이고 나서야 여성이 복수의 칼날을 겨누는 것이 용인된다. 그럼에도 “여성 캐릭터의 인격은 배제 채 이야기의 전개에 필요한 객체로써 다루어지고 있다.”(배유리, 2016) 객체인 여성은 여전히 피해자이거나 어머니이다.   

  

죽은 아이를 끌어안은 어머니는 아이의 복수를 할 욕망을 얻게 되어, 가해자를 처리했다. 그렇다면 아이가 없는 여성 주인공의 경우는 어떨까? 그 주인공에게는 사회가 어떠한 욕망을 수여해줄 수 있을까?     

사회는 아주 너그럽게도 모성 외의 다른 욕구를 하나 더 인정해주기로 했다.           




2. 사회가 허락한 여성의 욕망 – 사랑     


여자는 항상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모성 이데올로기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여성에게는 ‘로맨스’가 있다. 로맨스야 말로 여성을 가부장제에 종속시키는 아주 유용한 도구다. 로맨스를 통해 여성은 어머니의 역할로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니, 아주 좋은 먹잇감에 틀림없다.     


스릴러 장르 속의 가족이 없는 여자 주인공은 자신을 거둔 존재들을 어머니처럼 따르며 그들을 사랑한다. 이때 이들의 사랑의 욕구는 ‘인정’이다. 어린 주인공들은 자신에게서 사라진 최소한의 보호막을 찾아 유사가족관계를 형성한다.(박미영, 2020) 유사-어머니는 주인공을 사랑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필요성을 실험할 뿐이다.


인정받기 위해,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 주인공이 언제 각성하느냐? 그것은 사랑하는 남자가 위험해졌을 때이다. 사랑은 남자와의 로맨스로 변주된다. 영화 〈차이나타운〉이 그렇다. 일영은 엄마가 석현을 죽이자 엄마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사랑은 대체된다. 일영이 계속해서 안에 머물고자 한 가족은 이미 해체된 지 오래였다. 어쩌면 다시 형성되지 않았던지도 모른다.


일영은 사랑받고자 했고, 사랑받지 못해 분노했다. 여성 서사를 그린 영화 〈차이나타운〉은 남녀 관계를 의도적으로 바꾸어 놓으며 현재까지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 존재하다 냉장고로 들어간 전형적인 여자 캐릭터를 석현이라는 남자 인물로 그렸다. 그 지점에서 〈차이나타운〉은 꽤 잘 구성된 여성 서사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언제나 여성 주인공들에게는 너무나 바라는 점이 많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유사-어머니 관계인 ‘엄마’도 잃었다. 그렇다면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로맨스 장르를 살펴보자. 로맨스 장르에서 여성에게 허락된 사랑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로맨스 장르에서 여성은 당연히 ‘남성과의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여자는 타자화 되어 남성 중심적인 이미지에 갇히거나, 원본 없이 혐오적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된 “속물”이어야 한다.(김은정, 권경미, 2018)


이는 남자 주인공이 개입할 공간을 여자 주인공보다 한 단계 상위 단계에 위치시킨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바꿔가는(가르치는) 과정이 바로 로맨스인 것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남자가 원하는 남성 중심적 이미지에 맞춰가는 과정이거나 “속물”인 여자 주인공이 사회에 알맞게 계몽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여자 주인공은 남성의 시선(가부장제)과 현실 사회(신자유주의의 가치)에 이중으로 속박당한다. 이곳, 어디에 여성의 욕망이 숨어 있을까? 여성의 욕망은 단 하나다. 남자 주인공에게 사랑받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모든 것을 중요치 않다는 듯이 움직이고는 한다. 나는 그런 여자 주인공이 잘 이해가지 않는다.      


사실 그건 당연하다. 로맨스 장르 안의 여자 주인공은 오로지 사랑만을 욕망하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것을 욕망하는 사람인 나는 그 주인공을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           




3.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여성의 욕망  

 

그렇다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욕망의 종류란 어떤 것일까? 묻는다면 답할 수 없다. 인간은 수많은 것들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수량화하며 비교할 수 없다. 한 명의 사람에게도 수십만 개의 욕망이 있다.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욕망을 표현하는 여성 인물을 찾아, 다시 스릴러 장르로 가보자. 서브컬처로 향하면 마인크래프트 스토리형 콘텐츠 〈서리사막의 도둑들〉이 있다. 여성 제작진과 여성 출연진으로 이루어진 〈서리사막의 도둑들〉의 배경은 어느 가상의 왕국의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여자 교도소’이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은 욕망을 가진 채 이 공간에 모인다. 이들의 욕망은 보물을 훔치는 것이기도, 혹은 단지 누군가를 향한 광신적인 애정이기도 하다. 한 가지 공통점은 절대 사회에서 이들의 욕망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뒤틀리고 비틀린 욕망은 ‘교도소’라는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풀어진다. 이들의 욕망은 단지 선악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모성이지도, 사랑이지도 않다. 왕국의 보물 ‘사막의 심장’을 훔치기 위해 위장하여 교도소에 들어온 대도 주인공과 그 대도의 광팬인 ‘독고루미’(루미)가 있다.


루미는 등장인물 중에 가장 이해되지 않는 욕망을 가진 인물이다. 보물을 훔치기 위해서, 도둑인 주인공을 잡기 위해서,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 등의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교도소 안에서 뜬금없는 ‘팬심’이라니. 그러나 비일상의 교도소 안에서 루미의 욕망은 금세 납득되고야 만다. 교도소는 원래 ‘사회에서 어긋난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니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모두의 욕망은 스스로와 서로를 얽매며 이어진다. 각자 자신의 욕망이 그린 선을 뛰어가던 인물들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악인 교도소와 권력층의 비밀을 알아내고, 각자의 욕망을 한데 뭉친다. 비밀리에 생체실험을 하던 교도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들은 서로를 배신할까 의심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다, 결국 제일 무고한 두 명의 희생을 끝으로 교도소에서 탈출한다.     


또 다른 이야기를 보자. 네이버 웹툰 〈살아남은 로맨스〉가 있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웹소설에서 클리셰로 사용되는 ‘빙의물’(현실을 살던 주인공이 자신이 읽은 책의 주인공에 빙의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주인공 은채린은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 소설의 여자 주인공이다. 끊임없이 ‘질투하는’ 여자 인물들과 갈등을 겪고 결국 남자 주인공과 이어지며 사랑을 ‘쟁취’하는 채린은 빙의물의 주인공답게 자신의 앞날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채린이 마주한 것은 로맨스가 아닌 좀비였다. 갑자기 학교 안에 좀비들이 채린을 죽이려 달려들었다. 좀비에 물린 순간 채린은 그 당일 아침으로 회귀한다. 빙의와 회귀의 소재는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아주 흔히 사용된다. 그러나 이곳에 좀비라는 비일상을 섞고 나서야 채린은 남자 주인공을 중요도에서 지운 후, 자신과 끊임없이 갈등했던 같은 반 여자 인물들과의 연대를 실행한다.


자신을 구해준 얼굴을 모르는 X를 찾아 채린은 반 아이들을 모두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채린을 이 끔찍한 상황에서 나가게끔 해주는 토대를 마련해준다. 여성혐오적인 흔한 클리셰를 완벽하게 부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채린의 욕망은 ‘돌봄’과 다르다. 채린은 연대한다. 제4의 벽, 그 벽이 채린에게 ‘표상적인 로맨스 장르의 여자 주인공’의 역할을 강요하지만 채린은 제4의 벽을 거부하고 자아를 취득한다. 자아취득은 생존을 위한 연대의 토대에서 세워지고, 갖은 고난을 겪은 후에야 채린의 욕망은 ‘자아실현’이 된다. 남자 인물들에게는 아주 손쉬운 이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채린은 수백 번 죽고 실패하고 목숨을 걸어야 했다.      


두 작품은 여성 인물의 욕망을 긍정시키기 위해 ‘비일상의 공간’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왜 비일상이어야 했을까?


일상물로 칭해지는 여성 서사 웹툰인 〈피라미드 게임〉, 〈나쁜 쪽으로〉 모두 심리 스릴러물로 이들의 욕망은 용인되지 않는다. 향유자들은 인물들의 욕망을 긍정하기보다는 손가락질하며 ‘사이다’가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서리사막의 도둑들〉과 같은 제작팀이 만든 2000년대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우정리 노트2〉에서도 주인공을 좋아하며 질투하는 양가적 감정을 지닌 인물의 욕망은 끝까지 이해받지 못한다. 주인공에게도 배척당한 인물은 향유자들에게도 외면받았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채 빌런에게 살해당했다.     


현실에서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욕망’을 지닌 인물들은 같은 욕망을 가진 남자 인물에 비해 2배 이상 부정당하고 3배 이상 비난받는다.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다. 여성 인물이 ‘주제넘은 욕망’을 표출할 때, 대중들은 갑자기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며 인물을 비난한다. 이 비난은 곧 스포츠가 된다.


웹툰 <신의 탑>의 라헬은 웹툰 초반 남자 주인공의 밤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네이버 웹툰 계의 쌍년’으로 통용된다. 주인공에 반대되는 빌런의 역할은 절대 차지할 수 없었다. 라헬의 행위가 옳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 누구도 라헬의 욕망을 들여다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보자.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비일상에서 여성들의 욕망이 긍정되는 경향성을 생각하자면 현실의 일상 속 여성들의 욕망의 존재 여부가 궁금해진다. 우리는 현실에서 얼마나 욕망이 거세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가? 장르는 언제나 사회와 피부를 맞댄 채 변화한다. 우리는 촉각으로 장르의 변화를 낱낱이 느낀다. 장르 속에서 허용된 욕망은 가부장제를 공고히 한다. 반대로 장르 속에서 허용되지 않은 욕망은 여성 개개인의 성취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는 홀로 걷는 신자유주의 가치에 기반을 둔 페미니즘적 행위가 아니다.      


사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더 있다. ‘약자들의 연대’, ‘여성들의 연대’가 모든 등장인물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된다는 점이다. <서리사막의 도둑들>과 <살아남은 로맨스>는 여성 개인의 성공을 연대의 가치로 해석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며 향유자들에게 모든 인물의 욕망을 긍정시킨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인간은 ‘연대’를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대부분은 약자의 위치에서 살아온 여성들은 연대의 가치를 안다. 이들은 서로를 믿고 비일상의 세상에서 서로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며, 모성이 아닌 이유로 희생하고 사랑이 아닌 이유로 함께 생존을 도모한다.      


사회에서 허락하는 욕망을 모두 지우고, 스스로의 욕망을 덧씌운 여성 인물들은 연대의 가치를 쟁취한 채 콘텐츠 안과 밖에서 동시에 ‘성공적’으로 행위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위의 질문을 다시 변주시킨다. 우리가 거세당한 욕망을 다시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제 답은 명확해졌다. 홀로 앞서 걸어가는 것에도 물론 의미가 있다, 그러나 피부에 와닿은 이야기들을 이렇게 말한다. 이제야 연대의 가치가 명확해졌으니, 주변을 살펴 다른 이의 손을 잡으라고.      


일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변했다. 오미크론 변이로 점차 고립된 개인을 만들어내는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시 상황으로 날 선 세상 속에서 우리가 향해야 하는 곳. 그곳은 결국 약자들의 연대 속에서 피어나는 목적성을 따르는 길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관용구는 누가, 누구와 뭉쳐야 하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다시 수정하자면 이렇다. ‘비일상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우리는’ ‘약자들과’ 뭉치면 살고, ‘약자들과’ 흩어지면 죽는다.       






                        


· 참고문헌


1.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부키, 2017.

2. 박미영(2020), 「한국 여성 스릴러 장르와 프레카리아트의 고딕적 상상력」, 『아시아영화연구』. 13(1), p.33~58.

3. 배유리(2016), 「한국 스릴러 영화의 여성 캐릭터 분석」, 『기초조형학연구』. 17(6), p.258~269.

4. 김은정, 권경미(2018), 「웹툰에 나타난 불유쾌한 로맨스와 여대생 표상 연구」, 『애니메이션 연구』, 14(3), p.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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