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 Mar 15. 2022

취향의 원형 찾기

#취향

[주간자유] 2022. 03월 주제 1 #취향

무엇을 좋아하시나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항상 묻는 공통 질문이 있다. 간단하다, ‘책 좋아하세요?’와 ‘술 좋아하세요?’ 그리고 ‘커피 좋아하세요?’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면접이 아니기에 이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저 중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주제로 틀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간다. ‘술’은 ‘어떤 주종을 좋아하시나요?’라는 하위 질문으로 이어갈 수 있고, 그렇다면 언젠가 차후에 만남을 기약하기 쉽다. ‘나중에 00 마시러 가요.’와 같이 말이다. 


‘커피’는 변주되어 차나 음료가 될 수도 있다. 캡처로 2년 넘게 방치된 다관 세트가 나오는 카페나 언젠가 꼭 가보겠다고 다짐한 애프터눈티 세트를 파는 카페 이름을 들먹이며 ‘다음에 00 같이 가요.’와 같이 이야기한다. 커피는 드립 커피도 좋아하는지 한 번 더 묻고는 맛있는 카페를 아냐고 묻는다.(사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아는 것이 없지만, 우리에겐 SNS 데이터베이스가 있으니 아는 척 하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책은 좀 다르다. 책은 사실 약속을 이어나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요소다. 그렇다면 첫 만남에서 꺼내기 아주 애매한 질문이 아닌가? (나중에 광화문 교보문고 같이 가요, 라고나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항상 묻는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찬실이는 단편영화 감독인 김영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찬실과 영이 이자카야에서 술을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영: ‘동경 이야기’ 봤었는데, 조금 지루하더라고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요. 전 점점 더 재미있는 영화가 좋더라고요

찬실: 뭐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엄마가 죽었는데, 아들도 전쟁에서 죽었고. 그게 뭐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예요.

영: 그런 이야기를 좀 심심하게 그리시는 것…

찬실: (말 자르며) 심심한 게 뭐 어때서요? 본래 별 게 아닌 게 제일 소중한 거예요. 오스 야스지로 감독님이 그런 걸 영화에 다 담으셨잖아요. 그 보석 같은 게 그분 영화에 다 나오잖아요. 영이 씨 눈에는 그런 게 안 보여요?

영: 보여요. 그래도 전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 좋아해요.

찬실: 놀란? 아, 그런 영화 좋아하는구나.

영: 어렸을 때는 홍콩영화도 많이 좋아했고요.

찬실: 에, 좋지요. 홍콩영화도. 저도 어렸을 때 장국영 진짜 좋아했었어요.

(홍종선, [홍종선의 명대사⑪] 윤여정에게 ‘뼈명언’ 듣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 데일리안, 21.07.07.)     



여기서 〈동경 이야기〉는 시네필에게 유명한 감독인 오즈 야시지로의 1953년 작이다. 오즈 야시지로, 사실 나는 이 감독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는 이 감독을 안다고 했다. 아마도 시네필 사이에서는 유명한 감독인 듯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름은 안다. 영화에 크게 관심이 있지 않은 나도 알고, 영화관에 가는 것을 돈 아깝다고까지 표현하는 내 친구도 알고, 매번 울면서 티켓팅을 하며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는 친구도 안다. 그건 홍콩영화도 마찬가지다.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내가 정확하게 저렇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이 이렇게 끝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같이 간 친구도 정확히 저렇게 말했다. 뭐가 아무 일도 없었냐고. 아주 극적이고 엄청난 일들의 연속이었다고. 그때 친구의 표정도 김이 다 빠진 콜라 같았던가? 모르겠다.)     


찬실이는 “놀란? 아.”라고 말한다. 저 “아.”의 어조와 억양, 그리고 찬실이의 표정을 보면 나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고야 만다. 같은 깊이로 관심사를 공유하는 줄 알고 급격히 벅차오르다가 갑자기 대중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듣고 김을 푸스슥- 빼내는 소리, 그 소리가 아닌가. 홍콩영화를 좋아했다는 김영의 말에 이제 찬실이는 심드렁한 채 답한다. “저도 어렸을 때 장국영 진짜 좋아했었어요.” 

가득 부푼 찬실이가 바람이 다 빠진 채 쪼그라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별안간 혼자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책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아니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답이 ‘좋아하긴 하는데 자주는 못 읽어요’이고 이 답변은 나도 애용하는 편이다. 이어지는 질문은 ‘그럼 어떤 책 좋아하세요?’이고 사람들은 고민하며 저마다 책 이름이나 작가를 말하거나 장르를 이야기한다. ‘추리소설이요, SF소설이요, 한국문학이요, 에세이를 주로 읽어요, 최대한 편식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까지. 잘 아는 장르거나 작가라면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잘 모르는 장르와 작가라면 그 자리에서 알라딘에 검색을 한다. 검색 결과 내가 조금이라도 알거나 들어 본 적이 있는 책 제목이나 출판사라면 괜히 그 지점을 가져와서 나쁘게 말하면 아는 척을 하고, 좋게 말하면 조금이나마 공통점을 만들어 내고 싶은 발악을 한다.  


    

그중 요즘 가장 자주 듣는 작가 세 명을 꼽자면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이다. 드디어 내가 약 3년간 존중하며 버티던 SF 대부흥기가 도래한 것이다. 서점에 가도 항상 장르소설의 하위의 하위의 아주 작은 책꽂이에 존재하며 쭈그려 앉아야만 목록을 살필 수 있던 바로 그 장르가! 드디어 베스트셀러의 ‘누워 있는’(서점은 누워 있는 책과 세로로 꽂힌 책의 위상이 전혀 다르다) 매대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SF장르는 통합되지 못해서 내가 원하는 책은 각각의 장르 매대, 한국문학, 장르문학, SF소설 칸을 쥐 잡듯이 뒤져야 한다. 내가 먹은 누네띠네 부스러기마냥 소설 분야 책꽂이 오만 군데에 숨겨져 있다. 


그다음으로 주로 듣는 작가는 ‘최은영, 황정은, 강화길, 구병모, 한강(한강 작가는 시집에 대한 언급이 더 많다)’ 이거나 ‘박완서, 박경리, 신경숙’ 같은 중견 작가이다. 희한하게도(사실 전혀 희한하지 않게도) 남성 작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거나 적다. 게다가 외국 작가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었다. 이건 물론 나의 아주 좁디좁은 인간관계를 표준 집단으로 삼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코로나 시대 이후에 한국문학의 인기가 조금 늘었다는 말을 체감하고 있는 듯도 하다. 

 


나는 사실 작가 분류로 사람을 이해하곤 한다.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 작가님을 좋아하는 사람. 최은영, 황정은, 강화길 작가님을 좋아하는 사람, 구병모 작가님을 좋아하는 사람, 한강 작가님을 좋아하는 사람, 박완서, 박경리 작가님을 좋아하는 사람과 신경숙 작가님을 좋아하는 사람. 아주 엉성하고 조잡한 빈틈투성이의 내 머릿속의 데이터베이스는 마치 MBTI 밈처럼 여러 유형을 가지고 있다. 나만의 북-비티아이(Book-MBTI)인 셈이다. 이 북비티아이는 작가의 수만큼이나 무한한 교집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교집합은 책을 넘어서 영화, 드라마, 만화 등의 여러 매체로까지 뻗어갈 수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설명하는 사람들을 향해 눈을 반짝인다. 취향은 바뀌는 것이다. 변동성을 가진 지점에서 취향이 유의미하다. 그건 다른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추구하는 이상향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로서 작용한다. 그러니 이만큼 처음 보는 사람을 단번에 이해하기 좋은 자료가 없다. 


과거에 홍콩영화를 좋아했고, 현재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는 김영의 취향은 대중적인 것이고, 그는 과거에도 대중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취향은 바뀌지 않았으니 그는 아마 과거와 크게 바뀌지 않은 사람일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 김영 같은 사람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보다 게리 로스의 〈오션스 8〉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정세랑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김초엽 작가의 책을 좋아할 확률이 크니까 그 작가 책을 추천하면 어떨까?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을 재밌게 읽은 사람에게 나오미 엘더만의 소설을 추천하면 더 좋아할 것 같은데? 김초엽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김보라 감독님이 단편 〈스펙트럼〉을 영화화 한다고 했으니, 개봉하면 같이 보러 가자며 차후의 만남을 기약할 수도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에세이 《불안의 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처음 듣는 작가였고 처음 보는 책이었지만, 이 출판사의 기간 도서를 살펴, 《달걀과 닭》을 출간한 출판사라는 것과 배수아 작가가 번역한 도서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렇다면 실험적이고 깊은 사유의 책을 좋아한다면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혹시 배수아 작가가 좋아서 읽게 되었다면 김사과 작가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이어 절로 들고는 하는 것이다.      



사실 아는 척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내게 이런 루트를 만들어가는 일은 상대의 관심사를 더 이해하려고자 하는 나만의 노력이다. ‘다독하려고 노력을 하기는 하는 사람입니다.’ 정도의 소개말을 꺼내는 나는 가끔 내가 읽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신작을 알고 출판사의 책 소개를 읽은 정도의 책도 추천하는 모양새로 꺼내 들고는 한다. 읽고 재밌으면 저도 말해주세요, 하는 말도 꼭 덧붙인다. 


이따금 나에게 “00님, 이 책 좋아하실 거 같아요.” 하는 말을 듣고는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아주 빠른 시일 내에 그 책을 찾아본다. 읽고 정말 마음에 들면 꼭 추천해준 사람에게 짧은 연락을 남긴다. “추천해 주신 책 읽어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이건 시작이다. 이 이후로 내가 뭐가 좋았고, 이런 점이 좋았고, 저런 점이 좋았고 나열을 하다가 이내 너무 친하지 않은데 오버하나 싶어서 내용을 1/3으로 줄여 보낸다. 마음에 쏙 들지 않았던 책이라도 꼭 “추천해 주신 책 읽어봤어요.”라는 연락 정도는 남겨 놓는다. 


내게도 그렇게 도착하는 반응들이 나의 북비티아이 알고리즘의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같은 책을 같은 이유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몇 번 보지 않아도 마음이 혹하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관점의 해석을 쏟아내는 이들에게는 아주 단시간에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책의 표지를 살피고, 책의 판형, 제본 형식이나 분량, 사용한 종이나 후가공을 추리하는 걸 좋아한다. 책의 무게도 느껴보고 안의 글의 레이아웃도 놓치지 않는다. 주석은 어떻게 달았는지 한 장에 본문이 몇 줄이 실렸는지도 생각나면 한 번씩 세어 본다. 그 직사각형의 물성을 가진 물체의 구성이 좋다. 그 작은 물건에 몇 사람들의 몇 년이 혹은 평생이 담겨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또한 글 형태의 책을 어떻게 표지, 일러스트 혹은 타이포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도 너무 흥미롭다. 표지의 이미지 자체가 원소스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가 아니던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책이 담은 서사를 책이 아닌 2차원의 이미지, 디자인, 3차원의 영상으로 구현해내는 점에도 관심이 많다.


 그리고 당연히 책을 읽기도 한다. 가끔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씹어 소화시키고 싶은 책을 만나면 흥분한다. 외울 기세로 문장을 따라 읽기도 하는데, 얼마 안 가서 금방 까먹기에 최근엔 기록에 열을 올리고 있다. 마음에 드는 소설 구절은 생각날 때마다 읊어 본다. 하지만 역시 소설의 문장은 그 맥락 안에서 사용하는 것이 제일 마음을 울리긴 한다.      


내게 보통명사로 쓰이는 책은 원형이다. 내 원형이 책이니 남들의 원형도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는 꼭 만나는 사람들마다 묻는다. 


“어떤 책을 좋아하시나요?”


이 질문을 곧 이렇게 풀이된다.


“당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원형은 무엇인가요?”






그 이야기의 원형을 소설, 그러니 서사 속으로 집약시켜보자. 취향의 원형을 찾아 들어가면,  항상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자주 인용하는 소설 두 개가 떠오른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모든 이야기가 지루하고 흥미로운 것이 없을 때마다 항상 돌아가는 곳은 《1984》속의 오세아니아이던가 《멋진 신세계》속의 문명국 속이 된다. 어쩔 때는 〈터미네이터〉시리즈나〈헝거게임〉시리즈를 보기도 한다. 


'언제나 재미있는 것' 


이에 이어 박지리 작가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도 한국 작품 속에서 찾은 나의 원형 중 하나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원형은 언제 읽어도 항상 재미있는 작품, 그러니 눈에 거슬리는 군더더기가 없고 인물들이 모두 딱 떨어지게 움직이며 모든 인물이 적재적소에 위치한, 그러므로 장르적 배경과 서사가 정확하게 맞물리며 결말을 보면서 첫 번째로는 입이 떡 벌어지고 소름이 조금은 돋아주어야 하고, 두 번째 역시 이마를 치게 만들어야 하고 세 번째부터 무언가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이 원형들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내 안의 원형은 마치 틀과 같아서 모든 이야기들은 원형의 틀을 한 번 거치고서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내가 사랑하는 디스토피아는 흔히 사람들에게 말해지는 'SF'와는 살짝 다르고, 쉽게 혼동하는 '아포칼립스'와도 전혀 다르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장르 클리셰가 너무 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안의 무언가가 점차 심장 부근으로 부글거리며 모이면서 얼굴로 쏠리고, '아니!'라는 감탄사와 함께 일장연설을 하고 싶은 맘을 꾹 참고는 말한다. "세상에." 


기술적인 진보를 이용해 시민을 옥죄는 독재정부 안이던가, 목가적인 사회의 아주 치밀하고 세심한 종교와도 같은 정신적인 세뇌이던가, 시민들을 등급으로 차별하며 억압하는 사회이던가. 거대 세력과 억압이 항상 등장하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힘없는 시민들이 연대하여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그 혁명은 성공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그 혁명이 성공하였으나 평등한 사회가 찾아오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건 아포칼립스와, 그러니 재난 상황에서 언제나 생존이 최우선의 목표가 되는 아포칼립스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SF는 나와 세상이 관계 맺는 이야기라는 글을 읽었다. 또한 SF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회의 방향성으로 흐르는 이야기이라고. 현실에서 상상 가능한 이야기를 한 번은 더 넘어선 상상 불가한 이야기. 


팬데믹 상황에는 전염병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큐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서점에 진열되었다. 새로 발간되는 SF들도 '전염병이 퍼진 사회'와 같은 문구로 소개되는 이야기들도 많아졌다.


SF라는 장르는 세상과 영 동떨어진 '판타지'같은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세상의 변화를 가장 밀접하게 반영한다. 그러니 SF를 쓰는 것도, 그 하위 장르의 디스토피아를 찾아 읽는 것도,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내가 원형을 거쳐 세상의 모든 서사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디 외따른 곳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의 사고 실험으로 한 번 검증된 틀로 세상을 이해하려 하는 시도가 될 수 있지 않는가.


혐오주의가 돈이 되고, 여성의 신체는 물화되어 팔리고, 신념은 사라진 채 혐오를 위한 혐오와 반대를 위한 반대만 넘쳐나고, 의견을 물으면 인터넷 사이트 주소를 가져오는 것으로 주장과 근거를 대었다고 우쭐대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나의 원형은 어떻게 이해시켜 줄 수 있을까.


최악으로 이끌어지는 사회는 《멋진 신세계》쪽에 가까워 보이고, 혐오를 위해 뭉친 집단의 무식함은 〈터미네이터〉세계관을 시작하게끔 한, 그러니 로봇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 하늘을 덮은 인류의 무식함을 떠오르게도 한다.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평화를 위한 길이라는 대통령의 말은 《1984》의 역설적인 문구를 떠올리게끔 한다. "전쟁은 평화, 무지는 힘, 자유는 예속."이라는 빅브라더의 문구를 납득시키는 조지 오웰의 글쓰기 능력에 감탄하기에 너무 일렀나 보다.


취향의 원형인 디스토피아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가끔 듣는 나는 어떤 압박 속에서도 항상 그것에 저항하는 세력을 본다. 그것은 체계적으로 체제에 저항하는 커다란 세력이나 단체이기도 하

지만 어떨 때는 아무 힘없는 몇 명의 어린 학생이기도 하다.  


그 자그마한 희망이라는 것이 사실 말하지 않으면, 그것을 지닌 이들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그 감정의 폭발력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하다. 그 감정은 어느 때는 옳은 길을 가기도 하고 중도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튀거나 의도치 않은 상징물에 고여버리기도 한다. 


디스토피아를 쓰는 작가들은 불합리에 저항하는 감정을 다루는 기술자이며 동시에 불합리를 합리로 인식시키도록 만드는 고문관이기도 하다.


이제 그들은 이 세상을 재료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줄까. 분노와 혐오로 움직이는 사회 속에서 그들이 새로 다룰 수 있는 마음이란 무엇이 될까? 


 나의 취향의 원형은 그러니 내게 향하기도, 남에게 향하기도 하는 질문이다.


"그러니, 이다음은?" 


그다음은? 그러면, 그다음은? 















매거진의 이전글 장르 속 여성의 욕망 들여다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