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무엇을 다루는 장르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손쉽게 ‘과학’이나 ‘우주’, ‘스케일이 큰 세계관’이라고 답하곤 한다. 그러나 진짜 SF의 맛은 우리가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없는 자연법칙이나, 아직도 다 밝혀내지 못한 우주의 비밀이나, 행성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된 우주에서 뛰노는 거대한 세계관보다는 작디작은 것, 우리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것, 바로 언어의 활용에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낯섦 속에서 낯익음을 발견하게 하는 것, 사회를 재현함과 동시에 빗겨가는 것이다. 이때 언어는 SF소설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이자 최대한의 규약이 된다.
배명훈 작가의 《미래과거시제》는 말장난 혹은 누군가의 귀여운 실수처럼 들리는 새로운 언어 체계라는 노붐을 도입하여 인지적 소외를 불러일으킨 후 원래 그러한 세상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척하며 독자를 자연스레 이끈다. 이때 생성된 의도적 거리감은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와 독자의 세계가 충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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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언어에 선행되는가?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고를 통제할 수 있는가? 이러한 주제의 사고실험은 이미 조지 오웰의 《1984》를 통해 선행되었다. 빅브라더에게 저항하는 단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철학과 방식을 공유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1984》에서는 신언어사전을 편찬하며 ‘나쁘다’는 단어 자체를 삭제한다. ‘나쁘다bad’는 ‘안 좋다not good’으로 표현되며, 결국 그것은 언제나 ‘좋다’의 반대말일 뿐, 진정으로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사용할 단어가 없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고, 대화할 수 없고, 뭉칠 수 없고 그러므로 위협이 될 수 없다.
이렇게 개인의 사고를 제한하는 형식으로 언어 규제가 활용된다면, 지금껏 우리가 생각도 하지 못한 사고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언어 체계가 도입된다면 어떨까?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미래과거시제>에서는 ‘-암-/-엄-’의 새로운 선어말어미를 소개한다. “미래의 일을 마치 과거에 직접 겪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92쪽)할 때 사용되는 이 선어말어미를 통해 독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시간 개념을 지닌 어느 새로운 종(種)의 출현을 상상한다. 그들의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공간에서 살아가고 그곳의 기후는 어떠한지, 우리는 ‘-엄-/-암-’을 통해 머릿속에서 새로운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시작한다.
테드 창의 <네 인생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컨택트>에 등장하는 외계인 헵타포드가 사용하는 언어는 마치 물감을 묻힌 붓의 획같이 퍼지는 원의 그림이다. 주인공인 언어학자 루이스는 헵타포드와 소통하려고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문장의 시작과 끝조차도 구분할 수 없는 그림과 같다. 그러나 루이스가 헵타포드의 언어에 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자, 루이스는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간의 분절과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 햅타포드의 방식으로 지구에서의 자신의 삶을 겪는다.
루이스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과거로 회상하게 되는데, 이는 아이를 낳은 적 없으나 자신에게 딸이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등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는 <미래과거시제>의 강은신의 언어 문법에 따르면 루이스는 아이를 낳암을 거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상대가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상대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이해하는 일과 같다. SF가 서술하는 새로운 언어는 단일종의 인간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지적 생명체의 등장을 암시함과 동시에 그들을 이해하거나 사랑하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이러한 사고실험으로 우리는 우리 사회 속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같은’ 존재들을 다시금 새로운 시각으로 살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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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카타파의 열망으로>에서는 팬데믹 이후 침이 튀기는 행위가 배설과 같이 금기되는 사회를 소개한다. 이 사회에서는 기식음 [ㅋ, ㅌ, ㅊ, ㅍ]과 긴장음 [ㄲ, ㄸ, ㅉ, ㅃ, ㅆ] 의 발화가 터부시되며 과거의 영상을 통해서만 기식음과 긴장음 음소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사라진 음소를 따라, 자소 또한 함께 사라졌기에 독자는 처음에 오탈자 가득한 이 단편을 보고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운다.
[달줄]이 아닌 [탈출]하자는 서한지 [시]의 말에 손을 잡고 역사학과(사실 ‘역사학과’는 경음화 법칙에 따라 [역싸학꽈]로 발음되는데 ‘복잡하게[복자파게]’를 ‘복잡아게[복자바게]’로 수정한 것처럼 ‘역사학과[역싸학꽈]’도 자소의 변형을 주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이브]를 뛰쳐나간다. 그러면서도 결국 유명 배우 서한지 [시]의 기식성와 긴장성이 동반된 음가를 견디지 못하고 흑흑[흐큭]하는 대신 흑윽[흐극]하고 운다. 이러한 언어 음가의 제약은 작가 특유의 유쾌함을 넘어 우리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비대면 시대를 견디며 느꼈을 여러 제약들의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언어체계로 새로운 존재를 암시한 작가는 이어 무겁게 내려앉은 팬데믹의 부정을 유머러스한 음성언어 규칙으로 풀어낸다.
현재 시공간의 특이점을 증폭시켜 구성한 세계에 한국의 색채를 덧입히는 과정은 한국 SF 문학에서 자주 관찰할 수 있다. 시공간과 등장인물의 이름을 한국인으로 설정하는 것을 넘어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교육기관을 ‘학당’으로 설정하여 전통적인 문화를 끼얹은 최의택 작가의 《슈뢰딩거의 아이들》, 화성으로 이주가 가능할 만큼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가진 사회임에도 지구의 시간과 맞춰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위성통신 앞에 모인 가족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묘사하는 오정연 작가의 단편 <분향> 등에서 나타난다.
현대 한국의 정서를 우주로 확장하는 작업은 소설집 《미래과거시제》의 <인류의 대변자>에서도 이루어진다. 이 단편에서 작가는 SF의 공간적 배경은 대한민국으로, 그리고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서사를 한국적으로 풀어내려고 시도한다. 우주군인 은수는 롯데타워에 안착한 비행선의 외계인을 접견하러 간다. 그러나 외계인과의 첫 조우를 앞둔 은수의 목적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영어 듣기평가가 이루어지는 일정 시간 동안 비행체를 이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한국 사회 내부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규칙을 우주적 배경으로 확장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당위를 반추하게 된다. 얼마나 우스운 부탁인가, 그러나 또 얼마나 중요한 부탁인가.
이런 서사는 한국의 SF와 아직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독자들도 조금은 광화문 위의 UFO와 청와대 접견실 안의 외계인을 상상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해내게끔 한다. 은수의 안건이 처음 등장하는 브리핑룸의 외국인들이 느끼는 황당함은 어쩌면 한국 사회와 긴밀히 접촉한 SF를 처음 접한 독자의 당황스러움과 일견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SF 장르에 익숙한 독자라면, <접히는 신들>과 <절반의 존재>의 담고 있는 질문이 익숙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SF 속에서 차용되는 인간 외 존재의 새로움과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한 질문. 이 지점에서 작가의 답변을 듣는 일은 SF를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떨림이자 설렘이다. 나의 언어가 차마 가닿지 못한 공간에서 작가의 언어가 시작될 때,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공간의 존재로 기지개를 켜며 꿈틀대는 ‘접힌 신’들처럼 경이감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며 밖으로 뛰어나갈 준비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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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붐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현재의 시공간을 다시금 되돌아보게끔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SF는 우리가 겪지 못할 미래를 상상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동시대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동시대성은 또 다른 인식의 발현으로 현실과 병렬하며 존재한다. 그렇기에 SF는 우주를 이야기하며 한국을 재현하고,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재생성한다. 그러므로 소설집 《미래과거시제》는 미래이자 과거, 그리고 독자의 손에 잡힌 물성 지닌 현재의 것으로 독자에게 읽혔고, 읽험고, 읽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