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영 작가의 《레이디 맥도날드》를 읽고
인간의 실존은 거주함이다. 이때 인간이 거주하는 곳이 바로 장소가 된다. 개방적이고 누구나 머무를 수 있는 공적 공간에서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으로 장소감(sense of place)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공간은 장소로 변환되고, 이 장소가 함의하는 가치들은 개인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은 우리의 최초의 세계이자 우주라고 말했다. 인간이 태어나며 뿌리내리는 공간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리고, 세계와 관계 맺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여기에 ‘레이디 맥도날드’가 있다. 맥도날드 할머니와 맥 레이디 사이의 레이디 맥도날드. 명칭에 공간의 이름이, 누구나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면 짧은 시간 동안 점유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이 들어간 노숙인 할머니가 있다. 레이디는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는다. 레이디의 이름은 맥도날드이지만, 스스로 불리고자 하는 호칭은 ‘김윤자 씨’이며, 김윤자 씨에게 맥도날드란 ‘거주 공간이 없어 길거리 대신 밤을 보내는 공간’이 아니라 ‘너무 맛없어서 사 먹을 수 없는 커피를 파는 공간’이다. 매일 저녁 일곱 시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 열 시간을 맥도날드에서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앉아 있는 김윤자 씨는 맥도날드를 점유하지만, 그가 겪는 장소감은 ‘이곳을 자신의 장소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일 뿐이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분리하는 김윤자 씨는 한 공간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세계 속에서 분열한다. 분열된 자아가 감각하는 맥도날드는 지나쳐 가는 거리의 골목길과 같은 공간일 뿐이다. 오래 앉아있는 고객을 고려하지 않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눈 아플 만큼 밝은 조명 밑에서 김윤자 씨는 자신의 낡고 볼품없는 트렌치코트와 그보다 더 낡은 분홍색 셔츠를 정리한다.
김윤자 씨가 소속될 수 있는 장소로 사람들은 으레 탑골공원을 떠올린다. 김윤자 씨는 사람들의 시선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취재하러 온 PD 신중호에게 자신이 ‘탑골’로 가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 그곳은 김윤자 씨에게는 ‘더러운 공간’이다. 그곳은 모든 정치인의 호칭을 ‘이 새끼’와 ‘저 새끼’로 통일해 부르는 남자 노인들의 일상적인 장소이다. 그곳에 여자 노인이라고는 식당 종업원과 그런 남자 노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는 이들뿐이다. 그러므로 김윤자 씨에게 탑골공원은 성범죄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는 공간이 된다. 그렇게 김윤자 씨는 소속감을 잃고 분열된 채 실존과 생존을 위협받는다. 여성 노숙자로서의 김윤자 씨는 어느 곳으로 향할 수 있을까? 나라에서 제공하는 무료 노숙인 쉼터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거주함을 실현할 수 없는 여성 노숙인 김윤자 씨는 그렇게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로 간다.
김윤자 씨가 장소 경험으로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하는 곳은 스타벅스, 일본 문화원의 뉴센추리홀, 그리고 조선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 나인스 케이트, 조선호텔의 사우나다. 현재 그의 상황과 수입으로는 꿈꿀 수 없는 수준의 소비이기에 그녀가 고른 공간은 남들에게 ‘허영심과 사치, 주제넘음’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장소가 김윤자 씨에게 제공하는 정체성은 무엇일까? 집이 없어 맥도날드에서 열 시간을 졸면서 보내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허영? 과거 외무부에서 근무할 정도로 엘리트였던 자신의 젊은 시절의 경험을 되살리고자 하는 마지막 발악?
그의 이상적 정체성은 높다. 그가 원하는 공간의 경험은 그의 이상과 합치된다. 그는 스스로 구체적 장소와 그곳에서 겪을 경험을 선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분노하는데, 이는 그에게 실존자의 주체성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세계와 관계 맺지 못하는 실존자는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가 되지 못한 인간은 응당 수동적으로, 주는 것만을 감사하게 받아 생활해야 하는 것이 사회의 질서이자 규칙이다. 이러한 자연적 질서를 거부한 그를 바라보며 불쾌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허영과 사치로 인생을 망친 여자라는 표면적인 근거를 분노의 이유로 제시한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에는 가사도우미 일로 일당을 받아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미소’가 등장한다. 미소는 일급은 그대로이지만 위스키와 담배의 가격이 오르자, 기호품을 정리하는 대신 거주 상태를 포기한다. 이때 미소의 선택은 실존을 위한 거주함의 포기가 된다. 미소는 월세방을 정리하고 대학 시절 같은 밴드 동아리를 했던 친구들의 집을 찾아간다. 여기서 미소가 거주 상태를 포기하는 행위는 선택으로 여기는 반면, 김윤자 씨의 경우 거주 포기는 수입 없음으로 인한 수동적인 행위로 읽힌다. 이는 같은 노숙자의 처지이지만 ‘늙음’이라는 특성이 덧붙여진 결과이다. 그러나 김윤자 씨의 상황은 “이런 데 살 바에야 차라리 집이 없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그는 점차 나이 들었고, 사모님에서 할머니가 되자 이제 그의 결정은 주체성이 소멸된 이의 선택이 된다.
물론 김윤자 씨의 일련의 선택들은 사회적으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 선택할 수 있는 주체성이 부재하다고 여기면서, 그가 겪는 노후가 무너진 삶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현상은 역설적이다. 여러 편견에 의해 재현된 레이디 맥도날드가 아닌 눈앞의 인간 김윤자 씨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노숙자, 여성, 노인이라는 세 가지 특성을 동시에 교차해야 한다. 그 세 특성의 교차점에서 우리는 김윤자 씨를 정확히 응시할 수 있으며, ‘그 어떤 인간도 길거리의 벤치에 앉아 죽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 명제를 (노숙자, 여성, 노인의 범주를 지워야만 등장하는) 인간 김윤자에게 적용할 수 있다.
현대 한국 사회의 사람들은 스스로에 너무 과잉 매몰되어 있다.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김윤자 씨를 보고 반면교사 삼아 노후 준비를 열심히 해서 건물을 샀다는 답변이 공감을 얻고 ‘대단하고 멋지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익명의 독자들이 이 소설을 통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같은 공간에서 다른 경험을 하는 주체들처럼, 이 이야기를 통과한 나와 익명의 독자와의 경험은 공간과 장소의 의미보다 더 깊은 간극을 만들어 낸다.
익명의 독자에게 김윤자 씨의 죽음은 개인의 문제이다. 그 ‘멍청한 선택을 한’ 노숙자이자 ‘허영과 과소비로 망한’ 노인이자 여전히 ‘공주인 줄 아는’ 여자의 문제일 것이다. 평생 자신이 가까워지지 않을 특성을 가진 김윤자다. 그러나 한은형 작가가 서술한 김윤자 씨의 삶을 자세히 보면, 고학력 인재임에도 ‘미스 김’으로 불리며 다른 남자 동료의 책상을 닦았던 1970년대 노동하던 여성이 숨어 있고,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서만 노후까지 이어질 경제력을 얻을 수 있는 당시 여성들의 상황이 감춰져 있고, 무료 노숙자 쉼터에서 쉴 수 없는 여성 노숙인으로서 사회적인 경험이 섞여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절반이 그래온 것처럼 익명의 독자들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 소설을 집필한 한은형 작가처럼, 긴 인생의 짧은 부분을 차지하는 김윤자 씨의 조각난 사소한 이야기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레이디 맥도날드》를 반납하러 도서관에 걸어가는 길목의 공원에는 할머니가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들과 운동하는 할머니들과, 홀로 벤치에 앉아 막걸리를 드시는 할아버지가, 벤치에 드러누워 신문을 얼굴에 올려놓고 코를 고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공원의 지름길로 도서관을 향해 걸으며 나는 계속해서 소설 속에 검은 획으로 존재하는 ‘김윤자 씨’를 찾았다. 그러나 단수로 존재하는 ‘김윤자 씨’는 없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김윤자 씨’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어떤 공간에서 간신히 자신의 몸을 누이는가.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사회구조적 문제가 김윤자 씨의 현재 상황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김윤자 씨의 삶을 한 개인의 실패만으로 바라보는 해석을 마주할 때 마음속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며 손사래 치는 목소리가 있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한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지 말아 달라는, 과도히 개인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는 사회는 무언가 잘못인 것 같다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마지막으로 발악한다. 《레이디 맥도날드》를 읽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는 자기 회귀적인 감상이 아닌 ‘왜 그는 길거리에 앉아서 죽어야 했는가?’ 같이 밖으로 향하는 물음이 먼저 등장하는 사회이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편견에 기대 멋대로 내린 판단보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 먼저 떠오르기를, ‘나’보다 ‘그’의 존재를 먼저 고려하기를 바란다. 그럴 때에서야 비로소 3인칭 타인인 ‘그’가 ‘나’가 된다는 점을 꼭 잊지 않기를 바란다.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Opinion] 장소 개념으로 보는 여성 노숙인의 분열과 실존 [도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