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
하나의 언어는 하나의 세계와 같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언어는 사고를 넘어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모든 틀을 바꾸어 간다. 다양한 색채어를 가진 언어 사용자들과 다르게 청록색과 진녹색을 구분하는 단어가 없는 언어 사용자들은 두 가지 색채를 구분하지 못하고, 위치 부사어가 적은 언어 사용자들은 도심 속 비슷한 건물들 사이의 길을 설명하는 일을 어려워하지만 그들의 주로 생활하는 열대 우림 속의 길은 자신들의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해 낸다. 언어가 사고를 제한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언어는 사용자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언어는 사용자들이 더 편하게 생각할 길을 열어주는 지도 제작자의 나침반이 된다.
같은 발성기관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언어조차 이렇게나 다른데, 전혀 다른 신체 감각과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 동물의 언어는 어떨까? 동물이 인간과 같은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렇다면 동물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한가?
연극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에는 ‘동물어학습능력’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 ‘지니’는 다른 인공지능 로봇 A.I.R(에어)들과는 다르게 입력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궁금해한다. 명령이 입력되고 행동이 출력되는 그사이에 자신의 의식이 개입할 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정부에서 관리하는 에어들 중에 최초로 발견된 능력이며, 정부는 특이점을 관찰하기 위하여 에어 지니를 ‘선주민 거주 지역’이라는 관리되지 않은 야생 구역으로 보낸다. 자신을 만들어 낸 문명의 과학보다 자연 속 선조의 지혜로 살아남아야 하는 선주민 거주 구역에서 지니는 여러 야생동물과 대화를 하며 동물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언어를 배운다.
의식이 생긴 유일한 개체가 만들어진 목적이 ‘동물어 학습’이라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만일 지니가 신경망 학습을 기반으로 하는 AI라면 한 종의 동물과 이야기할 때마다 지니의 세상은 끊임없이 확장되었을 것이고, 지니의 인공적인 뇌 속에 새로운 신경망이 형성되었을 것이며 그 어떤 에어들보다 더 크고 넓고 방대한 인공 뇌 신경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인물들은 지니에게 동물들이 지금 뭐라고 말하는지 묻는다. 지니는 항상 이렇게 답한다.
“번역이 안 돼.”
인간의 말로 번역이 안 돼.
지니의 신경망 알고리즘은 새의 지저귐과 인간의 언어로 구성된 문장 사이를 무수히 반복하여 오갔을 것이다.
“하늘이다, 같은 말이야.”
동물에게는 ‘나’라는 자신을 칭하는 주격이 부재한다. 동물의 세계는 자신뿐이고, 자신의 앞에 감각되는 세상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 동물들은 인식할 타자 없는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살아간다.
언어를 배우는 데 첫 단계는 듣기다. 그렇기에 지니는 동물들의 소리를 듣고, 듣기 위해 그들을 바라본다.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기에, 지니는 언제나 상대를 이해할 준비를 한다. 상대는 자신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에게 쉽게 말을 시작한다. 그래서 지니에게 인간 사이의 침묵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말하지 않아야 할 때, 그 침묵을 알게 되는 것은 지니와 선주민 거주 구역에서 사랑하는 관계까지 발전한 이나에게 거절당한 이후가 된다. 상대가 나의 기대와 다를 때 사용하는 침묵, 자신을 떠난 이나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 지니는 말한다. 침묵을 사용하겠다고.
과학자 리언의 말로는 여러 검사 결과 지니에게 의식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이나에게도 관객에게도 그 말은 그렇게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사실 이제는 지니가 의식이 존재하는지 중요하지 않다. 지니는 사랑할 줄 알고, 침묵할 줄 안다.
‘의식이 있는 인공지능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은 이제는 진부하다. 1993년에 개봉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그의 원작 소설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나 1995년에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까지,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질문은 SF 장르에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2023년의 질문은 이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의식이 있는 인공지능인 지니가 인간인가’가 아니라 ‘그래서 그 존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다. 나날이 새로운 기술이 경쟁적으로 발표되는 현대 사회에 포스트-휴먼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누구야?’는 중요하지 않다. ‘너’는 새롭지 않다. 관객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로 시작한다. ‘우리는 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이다.
이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서 제시된 단서가 있다. 반려동물로 키우던 변종 아프리카회색앵무 ‘바’를 국가에 빼앗기고 사람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선주민 거주 지역에서 살겠다는 이나가 처음으로 지니와 마주했을 때, 서로를 경계하는 대치 상황에서 지니는 이나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고 말한다. 이유를 묻는 이나의 질문에 돌아오는 지니의 답변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이유는 ‘이나가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팬데믹 상황으로 반복적으로 예기치 않은 봉쇄가 일어나고 1구역과 2구역, 네크, 선주민 거주 지역으로 나뉜 국가는 1구역에서 존속할 생물종과 아닌 종을 고르고, 팬데믹 봉쇄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 공급 기술을 독점하며 인공지능 로봇을 통해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 한다. 이러한 상황에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이란, 새가 먼저 먹어서 안전한 음식이라는 이나의 생각을 넘어서 지니에게는 우위에 서 위협적인 인간이 아닌 같은 위치에 존재하는 생물체로 인식된다. 그러니 위험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몸체를 쏘거나 동물을 살상할 수 있는 이나의 총구는 동물보다 사람에게 먼저 향할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니가 자신의 공동체에 새로운 타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단순하다. 최소한의 자기방어는 소리 지르기이고, 언제나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다가간다.
그를 두고 사람에게 실망한 이나, 에어에게 일자리를 뺏겨 실직자가 된 수나, 새로운 에너지원을 개발하여 공동체를 만들려는 리언은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한다. 지니를 친구로서 존중하는 이나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수나와 로봇이라고 주장하는 리언은 우리가 타자를 바라볼 때 가능한 모든 선택지를 제공한다. 수나와 리언은 여전히 지니를 명명할 수 있는 이름이 중요하며, 그 이름에 따라 공동체에 속하거나 배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공동체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하나다. 정의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1구역과 2구역, 네크로 나뉜 국가의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타인의 말을 번역하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를 독점하고, 반려동물을 잡아가고, 팬데믹이라는 인류 재난 상황 앞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의 언어들은 자기환원적이다. 부유한 1구역의 노인들은 죽기 전에 인공지능 로봇 에어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고 싶어 한다. 우리는 지니의 존재,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와 정의에 대해 묻기 전에 오히려 이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
이때 사용된 ‘인간’과 이나와 수나가 지니에게 명명한 ‘인간’이 같은 뜻으로 번역되는가?
지니는 에어이기 때문이 인공물이지만, 인간과 무척 유사하며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사고한다. 인간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정의에서 지니를 제외한다면, 단지 생물학적 탄생을 근거로만 정의되는 인간 집단이 이 시대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1구역에서 인공지능 로봇을 두고 원자 핵연료 기술을 독점하여 살아남는 동안 2구역과 네크, 선주민 거주 지역에서는 수많은 인간이 죽었다. 그렇다면 이때의 인간은 더 두 보기의 ‘인간’ 중 어느 쪽에 속하는가?
누구는 아가페적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누구는 인간을 미워하고, 누구는 에어를 증오한다. 이것이 인간이냐 아니냐가 더 이상 중요한 질문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너/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지니와 사랑하는 이나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사랑을 어떤 언어를 사용하여 번역해야 할 것인가?
참, 이 답변들은 인간의 말로 번역이 잘 안된다.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Review] 타자의 언어를 번역하는 일 ─ 연극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