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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Sep 02. 2023

독서에 관한 세 가지 질문



세상에는 이유를 생각하지 않은 채 ‘원래 그러한 것’이라고 믿는 것들이 있다. 우리보다 더 오래된 사회의 관습이나 전통이 그 예다. 관습과 전통, 더욱 큰 사회 구조 속 모두 그러한 것이라고 믿는 명제들에 대하여 ‘왜’라는 질문은 쓸데없는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은 책을 읽지 않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고 믿는다. 똑똑해지니까, 학교 성적에 도움이 되니까, 어쨌든 책에는 많은 것들이 쓰여 있으니까. 그러나 정확하게 그 이유를 아는 이는 없다. 독서는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독서는 좋다. 그렇다면 독서는 모두 좋은 것일까? 안 좋은 독서도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질문이 이어질수록 혼란스럽다. 도대체 애초에 독서는 왜 좋은 것이며, 왜 좋아야 하는가?



질문 1: 무엇을 읽는가


우리가 독서를 한다고 말할 때, 사회적으로 기대하는 분류의 책이 존재한다. 만화, 웹툰, 웹소설, 그래픽노블, 라이트노벨에 해당하는 장르의 책을 읽는 것을 독서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출판 관련 컨퍼런스나 유서 깊은 문예지에서 웹소설(하다못해 종이책으로 출간되는 SF소설조차도) 특집호로 다루어지는 상황에서 일상 언어의 의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독서는 좋은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독서’의 범주에 포함되는 책들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19세기에 소설, 특히 로맨스 소설은 ‘여자 혹은 아이들’이나 읽는 소설이었고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당시의 로맨스 소설이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이라든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2023년과 완전히 같은 종류의 작품을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재 제인 오스틴의 로맨스 소설과 올컷의 가정 소설은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고전문학이라는 위상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불유쾌한 명예는 그대로 로맨스와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작품으로 옮겨가다 결국 ‘여주판타지(여성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로맨스가 주된 내용이 아닌 판타지)’라는 새로운 장르명을 탄생시키기까지 했다. (판타지는 아직도 남자 주인공의 독식 체제이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는 장려되지 않는 소일거리이자 시간을 때우는 행위로 치부되었다. 헤르만 헤세는 당시에 많이 읽히는 작품들과 실제로 가치가 있는 작품을 구분하며 “불량독자”(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뜨인돌, 13쪽)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헤세는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우리 같은 작가들에게 반가운 일이지, 불평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태도일지 모르겠다.”(12쪽)라고 말하면서도 “남독濫讀은 결코 문학에 영예가 아닌 부당한 대접”(같은 쪽)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헤세가 생각한 “진정한 독서”는 무엇인가?


“올바른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을 뜻한다.”(129쪽) 그러므로 “책을 통해 스스로 도야하고 정상적으로 성장”(131쪽)하는 독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렇게 되면 이상적인 독자는 헤세가 만한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한다. 작가에게 끌려가며 읽는 첫 번째 단계의 순진한 독자에서, 작가를 추적하며 읽는 두 번째 단계의 독자를 넘어, 세 번째 단계의 독자는 “너무나 개성적이고 자신에게 충실해서, 무엇을 읽든 완전히 자유로운 태도로 대한다.”(229쪽) 그러므로 이정표에서도, 신문의 광고 문구에서도, 소설 속에서도 원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는 상상력과 연상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단계의 독자에게 무엇을 읽느냐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해석은 독자의 몫”(230쪽)이기에 이들은 활자를 읽고 터져 나오는 감각과 충동을 유희한다. 이때 “셋째 단계의 독자는 더 이상 독자가 아니다.”(232쪽) 


무엇을 읽느냐는 중요치 않다. 헤세의 표현에 따르면 ‘진정한 독자’는 무엇을 읽던 간에 자신의 오감을 충족시킬 상상력이 차오르며, 원하는 바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 


오천 원만 주면 키스해 준다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순정 만화, ‘회귀·빙의·환생’ 클리셰와 문장형 제목이 가득한 웹소설, 참교육과 사이다가 잦은 주기로 반복되는 웹툰, 독자의 왜곡된 상상력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목적뿐인 라이트노벨을, ‘진정한 독자’라면 어떻게 읽어나갈 것인가? 그리고 이때 독서는 좋은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 던지는 질문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질문 2: 왜 읽는가


구체적인 예시로, ‘빙의를 소재로 하는 중세풍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웹툰/웹소설 혹은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웹툰 A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웹툰 A를 왜 읽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도야와 성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점은 자명하다.


웹툰 A의 대략적인 줄거리가 ‘주인공이 자기 전에 읽은 로맨스 소설 속, 분량 없이 등장하는 귀족 가문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막내딸로 빙의하여 벌어지는 로맨스’라고 치자. 독자 B는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웹툰 A를 읽었다. 이 시간 동안 독자 B의 독서 행위는 시간 때우기나 소일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헤세의 진정한 독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한 대로 충만한 로맨스 서사를 중심으로 웹툰 A를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은 독자 B는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나에게 웹툰 A는 왜 재밌을까?’ 이에 대해서 고민하며 B는 웹툰 A를 다시 읽었다. 그러다 보니 독자 B는 자신의 취향에 대해 파악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웹툰 A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재미있구나.’ 그러자 독자 B는 다시금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웹툰 A는 왜 재미있을까? 만약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어서 재미있다면, 왜 사람들은 이러한 욕구를 원하는가?’ 그러다가 이제 질문은 밖으로 확장된다.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가치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사람들은 실재가 아닌 빙의 속의 인물에게서 이러한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가? 상정된 허구 세계와 액자 속 허구세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독자 B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웹툰 A를 다시 읽는다.


독자 B는 웹툰 A를 총 3번 읽었다. 이때 이 세 번의 독서 행위는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가? 만약 좋은 독서와 안 좋은 독서가 존재한다면, 이 세 번의 독서 행위 중 몇 번째 독서 행위부터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독자 B가 마지막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웹툰 A를 읽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궁금증과 관련한 분야의 여러 교양서나 연구서를 찾아보아야 할지도 모르고, 자신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관점의 비평을 찾아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의 의견과 전혀 다른 관점의 감상평을 찾아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상적 상황에서 독서 대상으로 포함하는데 의견이 분분한 장르의 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읽은 후 독자 B의 질문은 작품을 통해 자신을 반추하게끔 만들고, 그 사유를 기반으로 세계로 시선을 확장시킨다. 이 모든 질문에 답변을 마친 독자 B의 세상은 웹툰 A를 읽기 전과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상상 가능하다. 양서 중의 양서로 꼽히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은 독자 C가 있다. 어느 정도 독서 경험이 쌓인 독자 C는 남들이 보기에 멋있어 보이는 책을 읽고 싶었다. 세계문학전집 코너를 둘러보다, 제목을 가장 많이 들어 본 책을 고르기로 마음먹고 니체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 싸매며 간신히 완독한 독자 C는 이 책을 ‘차라투스트라가 그냥 여기저기 말하면서 돌아가는 산문시 같은 난해한 이야기’라고 이해했다.


독자 C는 ‘니체가 도대체 이 책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라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이 책을 다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덮어두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고전문학을 완독한 자신이 너무나 뿌듯했다. 이럴 때 이 독서는 좋은 것인가? 독자 C는 (한국어 번역본이지만) 니체가 실제로 쓴 책을 끝까지 읽었다. (번역본이지만) 니체가 쓴 묘사나 대사에 감탄하기도 했고, 마음에 와닿은 문장은 필사도 하며 니체가 주는 울림을 느꼈다. 


독자 B는 ‘(가제)눈 떠보니 사랑받는 막내딸이 되어버렸습니다?!’를 읽었고, 독자 C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이 경우에 독자 B와 C 중에 누구의 경험이 ‘진정한 독서’에 더 가까울까?


우리는 손쉽게 웹툰, 웹소설 같은 작품을 읽는 행위를 독서에서 제외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부분은 무엇을 읽느냐보다 무슨 질문을 가지고 읽느냐에 있다. 독서가 좋은 것이라고 했을 때, 작품성을 인정받은 고전을 가벼운 호기심을 가지고 읽는 것과 유희거리로 여겨지는 만화를 깊은 고찰을 통해 읽는 것 중 어떤 것이 ‘진정한 독서’에 가까운가? 


 


질문 3: 독서는 왜 좋아야 하는가


사회의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그 의문에 걸맞은 답변을 제시하는 일이다. ‘독서는 좋은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 질문에 생략된 부분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다.


누구에게 독서가 좋은 것인가? 그리고 ‘독서는 좋은 것이다’라는 명제가 증명 없이 참이라고 여겨질 때, 슬며시 사라지는 문제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책을 읽을 때, 각각의 책에 기대하는 바가 존재한다. 책의 표지나 제목을 보고 기대하거나, 전작이 좋았던 저자의 이름을 보고 기대를 하거나, 마음에 드는 책을 자주 출간하는 출판사를 보고 기대를 한다. 우리는 책을 읽는 독서는 좋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가 책에 거는 기대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좋은 쪽이다. 무언가를 읽기 전에 이미 독자가 전제하는 질문거리와 주제들이 있다. 그렇기에 책을 읽고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이미 읽기 전 좋을 것이라는 기대에 대한 배반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독서가 왜 좋은 것이냐는 질문에는, 독서를 해보았더니 좋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이어지고, 독서를 해보았더니 왜 좋았냐고 묻는다면, 독서는 좋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순환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대한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을 ‘좋다’고 말한다. 그러한 경험이 쌓인 독서는 좋은 것이다. 유아론적 시야를 세상으로 확장한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공간으로부터 내가 볼 수 있는 공간으로 향하는 확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지, 당위성이 없다고 믿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으니 기대하는 바도 존재하지 않고, 기대하는 바가 없으니 배반당할 일도 없다. 그렇다면 결국 독서는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 되지 않는가?


독서는 왜 좋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결국 그렇다면 독서가 안 좋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말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명확한 답변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질문을 멈춰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왜 우리는 독서가 좋다고 생각하는지, 도대체 왜 좋은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독서 경험 전반을 반추하게 된다. 인식 범위를 확장하며 더해지는 사유는 전보다는 확연히, 우리는 다르게 만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으로 마무리한다. 


독서는 왜 좋아야 하는가?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칼럼] 독서에 관한 세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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