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인간은 재화를 판다. 옆에서 서비스도 함께 판다. 그러다 못해 노동자의 감정까지 매대에 올렸다. 사기업의 서비스 업종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과도한 감정 관리 능력이 전문적인 직업의식이 되었고, 이 기이한 경향성을 타고 소비자들은 왜곡된 재화(재화+서비스+감정)를 자신이 ‘정당하게’ 구매했다고 착각한다. 사회는 순조롭게 악화되는 중이다.
앨리 혹실드는 《감정노동》(2010, 이매진)에서 ‘감정노동’을 처음으로 정의했다. 감정노동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과 다르다. 이런 감정 노동은 “정신과 기분이 잘 조절되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의 개성을 구성하는 본질이라고 여지는 부분까지도 다 내어 주어야”(혹실드, 21쪽) 한다. 또한 “노동자들이 고용주가 정한 규칙과 지침에 따라 그들의 감정을 관리(manage)하도록 기대되는 과정이며, 그것은 기업 이전에 더 넓은 사회적·문화적 규범의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다.”(신경아)
《감정노동》에서 혹실드는 승무원 노동조합은 없으나 서비스 부분 최우수 항공에 선정된 델타 항공의 승무원들을 인터뷰하고, 승무원 연수 센터에서 신입 승무원의 연수 과정을 직접 관찰하며 감정노동 사례에 대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감정노동은 고객-노동자라는 개인 간의 관계가 아닌, 사회적 맥락이 작동하는 감정 규칙(feeling rules)이 규범화되어 작동하는 결과라고 보았다.
감정 규칙은 “감정적인 대화 상황에서 감정의 흐름이 적절하게 오가고 있는지 가늠하는 기준으로 사용”(혹실드, 35쪽)되며, 이때의 ‘적절하다’라는 판단은 각 문화, 사회계층, 성별, 젠더, 종교, 사회 등의 여러 지위 기표에 의하여 변할 수 있다. 각 문화권과 사회에 따라 적절하다고 느껴지는 감정이 다르기에 감정노동자들은 “규범과 경험의 불일치(norm-state discrepancy), 즉 개인의 사적인 감정 경험과 감정 규범에 의해 처방된 상태의 불일치”(신경아)를 겪으며 이 불일치에서부터 사람으로서 존중받는 상태를 상실한다.
혹실드는 항공 승무원들에게 과도한 감정노동이 부과된 순간을 1970년대라고 말한다. 미국에 불경기가 오고 항공사 간 경쟁이 심화된 시기에 항공사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좌석과 노선을 증설하면서도 직원의 수는 늘리지 않았다. 승무원 한 명이 담당하는 승객의 수가 많아지며 전반적인 업무 강도가 늘어났으며 서비스의 질이 낮아졌고, 이로 인한 승객의 불만은 높아졌다. 승객들의 불만을 최소화하여 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은 더 친절하게 굴 것을 요구하는 기업의 새로운 규범이었다. 이러한 기업들의 해결방식은 소비자 주권의 매혹적 신화가 탄생하는 기반이 된다.
플라톤 이래 서구 사회에서 감정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고귀한 이성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벗어나야 할 육체의 감각이었다. 이렇게 주변화된 감정이 소비사회를 마주했을 때, 감정은 어느새 누군가 제공하고 제공받아야 할 경제적 가치를 지닌 서비스에 포함되었다. 기업에는 비용 없이 노동자들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경쟁력이 되었고, 고객을 응대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이 무슨 감정을 느끼든지 ‘당신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라는 뜻의 미소를 걸어야 했다. 이 미소는 꾸며져서는 안 되지만 꾸며질 수밖에 없었으며, 꾸며져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꾸며질 수밖에 없다. 삼중의 꾸밈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과, 자신의 감정에서 계속해서 소외된다.
황정은 작가의 단편소설 〈복경〉(《아무도 아닌》(문학동네, 2016) 수록)에서 백화점 침구류 매장 판매원의 감정노동을 주제로 한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손님에게 사과하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거두지 못한다. 손님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냐고, 정말 미안한 것이 맞느냐고 물어도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가짜 웃음(이라고 말하면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는 웃음)을 ‘웃늠’이라고 부른다.
“웃늠이라니 기묘하지만 웃음보다는 기묘한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생각인데요. 웃늠이 적당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왜냐하면 이것은 진짜, 웃지만 웃음이 아니니까.”
황정은, 〈복경〉, 206쪽
웃고 싶지 않아도 웃음을 지울 수 없는 노동자는 자신의 웃고 있는 얼굴에 대해 계속해서 독자에게 묻는다. 나의 웃음은 어떻습니까? 웃음입니까, 웃늠입니까라고. 공유된 감정 규칙은 고객-노동자의 관계에서는 제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욕을 하는 사람을 마주친다면, (괄호 칠 것이 없는 사람인) 내가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은 불쾌감, 분노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욕하는 ‘고객’을 마주친다면, (직원인) 내가 느끼는 첫 번째 감정이 불쾌감, 분노일 것이지만 이를 표현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감정노동자인 내가 불쾌감을 표현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소비자는 사회적 의례인 감정 규칙을 지킬 의무가 없다.
자신을 모욕하는 고객에게 불쾌감 대신 친절한 미소를 지어야 하는 괴리감에 대하여 델타항공의 승무원 연수 강사는 이런 말을 한다.
“승객이 여러분을 무시하고 있고 여러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면, 그 승객이 무시하는 대상이 여러분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하세요. 그 승객은 여러분의 유니폼, 델타 항공의 승무원이라는 여러분이 맡은 배역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걸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혹실드, 《감정노동》, 144쪽
이 발언으로 드러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승객은 승무원에게서 받은 공감이나 친절을 되돌려줄 의무가 없다.”(혹실드, 144쪽) 그리고 기업은 “승객은 항공권을 사면서 [승무원을 무시할] 그런 권리를 함께 샀기 때문에 짜증나는 일이 벌어지면 화를 참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가정”(혹실드, 144쪽)하라고 노동자를 향해 요구한다는 점이다.
감정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곳에서 시작한다. ‘나’와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의 자아의 분리를 요구할 때, 이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개인이 지닌 직업의식의 부재로 볼 수 있는가? 우리가 마주한 모욕 앞에서 자아를 스위치 켜듯 켰다 끌 수 있는가?
그리고 고객은 정말로 노동자를 모욕할 권리를 구매했는가? 만약 고객이 노동자를 모욕할 권리를 구매했다고 암묵적으로 상호 합의한 상황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집단은 누구인가?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조금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기업이다.
김현경 작가는 《사람, 장소, 환대》(2015, 문학과지성사)에서 생물학적 종인 인간이 사회적 구성원인 ‘사람’이 되기 위한 새로운 조건을 제시한다. 사람됨은 환대를 통하여 자리를 점유하며 얻어질 수 있는 자격이며 이 자격 조건은 사회에서 만나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갖출 수 있다. 타인이 내게 보이는 대접이 곧 나의 사람됨이 된다. 외국인은 환대받을 수는 있으나 성원권을 얻을 수 없기에 조건적 환대를 받게 되며, 여성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장소를 점유할 때 모욕을 듣는다. 상호작용에서 배제된 서비스 노동자는 유니폼이라는 낙인을 입고 ‘고객’의 장소에서 자신을 가린 채 존재한다.
A 회사 회의실에서 의견을 나누는 직원들 사이로 인사 없이 들어온 유니폼 입은 청소노동자는 조용히 쓰레기통을 비우고 빈 곳을 비질하고는 나간다. 청소노동자가 직원들에게 말을 거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회의하는 직원들에게 말을 거는 청소노동자는 죄송하지만 회의 중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침묵을 권유받을 것이다. 이는 상호작용에서 배제하려는 의도이며, 청소노동자는 사회의 성원으로 환대받지 못하였기에 회의실을 점유하지 못하여 비장소화되며 사회구성원으로서 사람이라는 자격을 얻지 못한다. 회의실에서 안건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직원들만이 사람으로 회의실이라는 물리적 장소를 점유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람됨의 조건인 성원권은 타고난 것이 아닌, 사회가 부여하는 기능적이고 수행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적 자아는 가면 혹은 체면으로 명명되는 ‘얼굴’을 얻게 되며, 이것을 공격받는 것을 두려워한다.”(안상원)
여기서 김현경 작가는 ‘모욕’의 개념을 새로 쓴다. 신분이 사라진 근대 이후 사회에서 신분제로 인한 명예는 사라지고,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존엄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가? 명예는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고 존엄은 명예와 무관하게 얻어지는 인간성이라고 이 두 개념을 대립시킬 때, 모욕은 명예를 실추할 수는 있지만 존엄성을 실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개념은 모욕의 수행적 성격을 무시하고, 모욕이 행해지는 동시에 새로운 위계관계가 재설정된다는 사회적 사실을 묵과한다. 모욕은 명예를 실추시킴과 동시에 ‘사람됨’을 파기시킨다. 이처럼 모욕은 개별적 현상을 넘어 구조적 차원의 개념이 된다.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160쪽
델타항공의 승무원 연수 강사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나’라는 자아는 근대 이후 사회에서 상호평등하며 존엄하다. 그러나 내가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사회적 명예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을 때, 강사의 말처럼 ‘항공사 승무원’에게 향하는 모욕을 ‘나’와 완벽히 분리할 수 있는가?
김현경 작가에 의하면 이는 불가능하다. 모욕은 ‘항공사 승무원’이라는 ‘나’의 존엄을 함께 파기한다. ‘나’가 느끼는 모욕감은 자존감의 결여나 직업의식의 부재가 아니다. 모욕이 사유화되었을 때, 감정노동자와 폭언하는 고객의 관계는 단지 A라는 직원-B라는 고객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모욕을 구조적 측면에서 함께 파악하였을 때, 이는 직원 A의 문제임과 동시에, A의 사람됨 자체에 대한 문제가 된다. 이 관계 속에서 감정노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남에게 무시를 당한다면 당하는 나도 나쁘다. 왜냐하면 내가 존귀하니까. 나도 실은 존귀하니까. 그런데 나는 과연 존귀한 걸까요? 내가 나를 존귀하다고 여기고 있는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귀하다는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나는?“
황정은, <복경>
모욕을 듣는 노동자는 사람-되기에서 튕겨 나오며 사회에서 배제당하였고 타의로 장소를 강탈당한다. 결국 모욕이라는 낙인으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은 비장소화를 택한다. 상호작용 의례의 대상으로 환대받지 못하여 사람 자격을 얻지 못한 이들이 있다. 바로 황정은 작가의 단편 〈복경〉의 화자 ‘나’가 그렇고, 영화 〈다음 소희〉의 ‘소희’가, 강남 서이초 교사 A씨가 그렇다.
2023년 2월에 개봉한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에 일어난 전주 콜센터 실습생 사망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고등학생 ‘소희’는 학교의 현장실습 형식으로 콜센터에 근무하면서 고객들의 폭언과 업무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택한다. 당시 근무하던 콜센터 부서는 해지방어팀으로 서비스를 해지하려는 고객을 대상으로 새로운 서비스 가입을 유도하는 높은 강도의 업무로 논란이 되었다.
감정노동자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최근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에서 ‘감정노동 종사자 건강보호 가이드’를 배포하고 2018년 10월 18일부터 감정노동자 보호를 명시한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21년 발표한 〈콜센터 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고객의 폭언이나 성희롱이 감소했다는 평가는 30.2%인 반면 감소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31.0%로 거의 동등하여 법개정의 효과가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회사의 감정노동 보호조치가 강화되었다는 평가는 25.3%인 반면 강화되지 않았다는 평가는 37.5%로 법개정 효과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더 많았다.
일반적으로 고객을 일대일로 응대하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을 “노동시장에서 가장 하위에 있는 감정노동 수행자들을 감정 프롤레타리아트(emotional proletariat)라고 규정”(신경아)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프롤레타리아트뿐 아니라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도 감정노동이 요구된다.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는 감정노동을 제공하는 데에 있어 자율성을 가진다고는 하지만, 기업이 만들어 낸 소비자 주권의 매혹적 신화가 너무 강렬해진 탓인지 이제는 사기업을 넘어 공공 영역에서도 고객이라는 정체성을 체화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절대적인 권력이 존재하지 않음을 참을 수 없어하며, ‘화낼 권리’를 누군가에게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소비자로서 화낼 권리를 구매했다고 믿는 이들이 모욕으로 사람됨의 조건을 파괴한다. 감정노동자로,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직업 종사자로서 ‘나’에게 가해지는 모욕은 ‘나’라는 자아의 존귀함이라는 의미에 균열을 낸다.
1970년대 미국에서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감정을 경제적 가치로 상품화하기 시작한 이래로, ‘친절하라’라는 기업의 (어느 선까지 상식적으로 보이던) 요구는 점차 사람들에게 시대정신처럼 퍼져나간다. 소비사회는 사람들이 소비로 정체성을 찾도록 만들며, 이에 기업들은 덩달아 소비자에게 ‘권력’을 얻었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마케팅 기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소비자 권력에 심취한 이들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무릎을 꿇으며 주문받는 노동자를 기대하며 콜센터, 백화점, 식당, 카페, 병원, 유치원, 공공기관에 ‘소비자’로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 발걸음을 따라 콜센터 직원이 죽고, 초등학교 교사가 죽고, 인간이지만 사람이 되지 못한 이들이 죽어간다.
최근 서이초등학교 교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2년 차 교사 A씨가 생전 학교폭력 사건 관련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과 모욕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A씨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사회에 공유된다. A씨는 교장에게 알려준 적 없는 핸드폰 번호로 수십 번씩 학부모에게 연락이 오는 것을 어떻게 헤야 하느냐고 조언을 구했으나, 당시 교장은 전화번호를 바꾸라는 조언을 해주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임시방편도 되지 않는 교장의 조언은 결국 죽음을 택한 노동자들에게 ‘그러니 일을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들과 비슷한 종류의 인식을 공유한다.
공무원들은 칼부림하는 악성 민원인들에 대해 토로하고, 유치원 선생님들은 자기 아이 얼굴의 밴드가 살짝 떨어져 있었는데 새것으로 갈아주지 않았다고 민원을 넣는 악성 학부모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고충을 처음 들을 것이 5년이 다 되어가는 와중, 과도한 소비자 정체성과 관대한 사회 구조가 개인 너머 사회 차원의 균열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현재 사회에는 지금까지 이들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아주던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이 넘실댄다. 더 이상 어떤 법 제도와 사회적 장치도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생각과 함께 사회적 약속의 신뢰가 사라지고 있다. 신뢰가 부재한 사회는 각자도생의 야생과 다를 바 없다.
감정이 상품화되고 모욕이 사유화되는 사회에서 노동자는 죽어간다. 이 시대정신을 격파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첫걸음은 이 모든 고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다음 걸음은 소비자 정체성을 버린 사람들의 환대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아무도 나를 돕지 않는다, 대신에 무조건적인 환대,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끔 하는 사회적 장치가 절실하다.
내일도 노동자인 ‘나’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이 글이 유서가 되지 않기 위해서.
· 참고 논문
신경아(2016), 〈감정노동의 사회학적 탐색 –이론적 고찰〉,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29, p.180-204.
안상원(2016), 〈지금,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이화어문논문 (40), p.239-244.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칼럼] 상품이 된 감정, 사유화된 모욕, 죽어가는 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