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일, 현지 언론의 발표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밀란 쿤데라가 향년 94세로 프랑스 파리에서 긴 투병 기간 끝에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등 당시 급박했던 냉전 시대를 직접 겪으며 그 역사 속 무거움과 폭력에 대하여 다루던 쿤데라는 1968년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민주자유화 운동 ‘프라하의 봄’에 참여하였으며 자신의 책을 금서로 제정하고, 집필을 막는 체코의 공산주의 정부의 탄압에 프랑스로 망명하여 작가로서 프랑스를 고국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그 이후로 쿤데라는 프랑스어로 글을 썼으며, 그가 체코 국적을 회복한 것은 2019년 무렵이었다.
그는 실제 자신의 삶에서 역사의 무거운 존재를 짊어지고 살아왔으며,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확인하고 신자유주의에서 극우 민족주의로 넘어가는 정치·사회 체제의, 다원화 및 개인화가 더욱 익숙한 젊은 사람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있다. 거대 진영의 대립이라는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공산주의 체제의 억압 속에서 집단의 일부일 뿐인 개인 존재의 무거움과 생의 가벼움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이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내가 밀란 쿤데라의 별세 소식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그의 저작을 읽으며 내가 세계라는 뼈대를 구성했던 20대 때 나의 세계가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20대의 내 세상이 지금까지 해체되고 붕괴하며 전혀 다른 세상을 구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저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과거를 지워낼 수 없는 것은, 결국 그 시절 나의 세상이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2016년 처음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2013) 을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9쪽)
니체의 영원회귀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체코의 프라하의 봄도, 밀란 쿤데라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문장은 아직도 외우라면 입에서 욀 수 있을 만큼 돌려 읽었다. 소설이란 텍스트 안의 인물들이 엮여 진행되는 과정으로 저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화자로만 존재한다는 ‘소설’의 정의조차도 산산조각 부순 이 책의 화자 혹은 작가는 소설 중간 숫자로 나뉜 꼭지 안에서 자신이 이야기 밖에 있음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소설의 진행과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으로 삽입된 꼭지를 읽고 있자면, 도대체 이게 무엇인가 하면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넘나들며 자신을 펼쳐나가는 존재가 바로 소설가구나, 작가는 이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구나 하면서 작가에 대한 정의를 새로 새웠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인물들을 묘사하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화자 혹은 작가가 나에게 문득문득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현실인 척하면서 이것이 가상의 허구세계임을 끊임없이 되새겨 주고 독자인 나는 이 허구와 현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책을, 그가 허구로 밀면 허구 세계 속으로, 현실로 끌어내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며 빠져 읽었다.
“작가가 자신의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다.”(69쪽)
토마시는 토마시의 부모가 아닌 “‘einmal ist keinmal.’이라는 문장에서 태어났”(같은 쪽)고, “테레자는 배 속이 편치 않을 때 나는 꾸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다.”(같은 쪽) 아무것도 모르던 독자는 허구 세계 속 실제 인물인 토마시와 테레자의 계보를 이리저리 틀어대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그리고는 “나는 가끔 그녀의 생김새가 어머니와 닮았을 뿐 아니라 그녀의 삶도 어머니 삶의 연장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75쪽)의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음사에서 밀란 쿤데라 전집을 펴내며 표지로 이용한 그림이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라는 것도, 마그리트 재단은 2차 가공을 허락하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그러나 ‘밀란 쿤데라’의 책에 사용한다고 하니 흔쾌히 허가를 해주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때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을 제대로 처음 보았고, 현재는 초현실주의 전시에 직접 찾아갈 만큼 좋아하게 되었다. 밀란 쿤데라도 전집의 표지를 보고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글을 읽었으니 어쩌면 좋아하는 작가를 따라 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체코의 프라하의 봄을 찾아보면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되짚었고, 냉전 시대의 소련과 미국의 대립, 그 시점에서 역행하여 제1,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찾아갔고, 레닌-스탈린의 공산주의 체제와 러시아 혁명, 소비에트연방의 몰락과 현재의 러시아까지 관심사가 옮겨갔다. 여전히 이념대립과 전쟁, 그리고 집단의 대립과 거시적 관점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사랑하고, 그렇기에 한 개인이 한 사회의 대표로 그려지는 르 귄의 소설을 사랑한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은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미묘하다.”(13쪽)
어느 날 내게 인생 책, 인생 영화, 인생 00이라고 칭하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전과 같이 모든 작품을 바라볼 수 없어졌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속 여성 인물은 남성에게 욕망 되는 대상에 한정되며, 남성의 욕망을 거절했을 때 처벌 받는다(거절은 남성 인물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합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소설 내에는 여성혐오적 편견에 기댄 묘사나 상황이 빈번히 등장한다. 소설 속 여성은 “유사 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 남자의 육체의 하중을 갈망”(12쪽)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나는 밀란 쿤데라를 무척 조심히 좋아한다. 1984년에 쓰인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서, 그렇게 조심스럽게.
그러므로 현재에 밀란 쿤데라를 2016년 20대의 나처럼 사랑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의 소설들로 만들어진 나의 세계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쌓아 올린 나의 세계에 많은 부분은 붕괴하고 괴사했지만 그 토양에서 다시금 지어 올린 나의 세계에도 여전히 밀란 쿤데라가 내게 남긴 것들이 있다. 그의 소설로 시작하게 된 나의 ‘깊은 독서 경험’과 생성된 나의 취향과, 무거운 주제와 철학을 우스꽝스러운 비극으로 풍자하는 이야기를 처음 느낀 충격, 그리고 여전히 그러한 ‘충격’을 주는 글을 찾아 책을 읽고 있는 2023년의 나.
2016년과 다르게 내 인생 책의 자리는 아직도 공석이다. 언제쯤 이 자리를 채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전 주인의 비보에 애도의 글을 남긴다.
평온하시기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원문 링크]
아트인사이트, [칼럼] 인생 책의 빈자리 ─ 밀란 쿤데라를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