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Christmas, Mr. Lawrence.
세계를 뒤흔든 코르디세프(Cordyceps) 감염병이 퍼졌다. 이 곰팡이 변종은 인간의 뇌를 장악해 공격적으로 만들고, 엄청난 전염 속도를 가졌다. 하룻밤 사이 세상은 폭발하듯 무너졌고, 조엘의 어린 딸 사라는 소란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조엘의 세상도 폭발하고 붕괴됐다. 이후 수년간, 조엘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검은 공허만 비칠 뿐이었다.
검역구역에서 조엘은 파트너 테스와 함께 작업했다. 그는 감정 없이, 냉혹하게, 그저 기능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레지스탕스 조직 파이어플라이의 리더 말린이 조엘과 테스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한 여자를 검역구역 밖으로 호송해 달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면 무기와 보급품을 넘기겠다. 여자의 이름은 엘리. 테스와 조엘은 엘리를 찾아냈다. 엘리는 지금껏 홀로 살아남았다. 그간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작고 마른 몸에 상흔이 수도 없이 남아있었다. 엘리는 그들의 시선이 불편한지 그 시선들로부터 숨으려고 했다. 하지만 조엘의 눈에는 보였다. 조엘의 가슴 언저리에 어떤 통증이 일었다. 엘리의 가느다란 목덜미에는 감염자에 물린 흔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염자 특유의 증상 없이 여전히 살아있다. 면역자. 테스는 그런 엘리가 인류를 구할 희망이라 믿었고, 그들이 치열하게 임했던 한 전투에서 죽어가며 당부했다.
"조엘, 이 애를 데려가. 모든 걸 바꿀 수 있어."
테스의 희생에 조엘은 마지못해 엘리를 이끌고 길을 나섰다.
조엘이 보기에 엘리는 이상해 보였다. 완전히 성숙한 여자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순수한 소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분명 옆에 있는데 동시에 다른 세상에도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른하고 무심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를 불량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 눈은 딱히 초점을 두고 다니지 않는다. 겁도 없다.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위태로워 보인다. 본인은 알아서 잘 살 테니 신경을 끄란다. 신경 쓰기 싫다. 신경이 쓰인다.
둘은 이따금씩 대화를 했다. 곰팡이에 대해. 전투에 대해. 인류의 생존에 대해.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왜 살고 있는지는 잘 몰랐다. 엘리는 왜 내가 당신과 다녀야 하냐며 각자 갈 길을 가자고 했다. 조엘은 그런 엘리의 되바라진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를 혼자 보내는 순간 얼마 못 가 죽어버릴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저렇게 작고 하찮고 약해빠진 애를 혼자 둘 순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겪고 왔는지 늘 어딘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엘리에게 조엘은 굳이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엘리에게 그저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엘리는 내가 죽든 말든 그쪽이 알 바는 아니지 않냐며 비아냥거리면서도 조엘의 뒤를 따랐다.
엘리는 이따금씩 조엘의 커다란 갈색 눈을 빤히 봤다. 너무 자세히 뚫어질 듯, 조엘이 무안해질 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어느 날 말했다.
"아저씨는 커다란 눈이 강점이면서 약점이에요."
"눈이 커서 잘 다치지."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요."
조엘은 엘리에게 투박하게 말했다. 별 표현을 안 했다. 엘리는 조엘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너무 많은 걸 흘리고 있어서. 조엘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엘리는 조엘을 읽을 수 있었다. 눈길로, 손길로, 발길로, 숨결로. 엘리가 조엘을 읽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조엘도 알고 있었다.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조엘에게 어떤 긴장을 주었다. 조엘은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은근히 굴욕적이기도 했다. 둘은 그 주제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조엘은 본인의 약한 면을 엘리에게 드러내기 싫었고, 엘리는 강해 보이고 싶어 하는 어른 남자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었으므로.
엘리가 본 조엘은 완벽해서 슬펐다. 정확하게 말하면 완벽하게 보이려고 해서 슬펐다. 그의 굳어진 어깨에 잔뜩 실린 책임감, 번민, 고뇌가 보였다. 그리고 느꼈다. 조엘은 과할 정도로 엘리를 보호하고, 몰입하고, 통제하려고 했다. 그 바탕에 그의 상실에서 비롯된 깊은 애정과 어떤 종류의 불안이 있다는 것을 엘리는 알았다. 엘리는 그의 그런 보호와 몰입과 통제를 거부했다. 엘리는 조엘이 무서웠다. 그 갈색 빛의 다정함이 무서웠다. 조엘의 온기에 엘리의 언 몸이 녹아들수록, 조엘이 엘리의 세상 속 태양으로 자리 잡는 것이 불안했다. 그 태양이 언젠가 져버릴까 봐. 그러면 그녀에게 익숙하지만 지금은 조엘로 인해 잠시 멀어진, 언젠가 다시 마주칠 추위를 견디지 못하게 될까 봐.
둘은 감염자들과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서로를 지키고 보호했다. 엘리는 조엘의 존재로 인해 처음으로 안심이라는 상태를 경험했다. 조엘의 단단하고 넓은 등을 뒤에서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물끄러미 보곤 했다. 저 뒷모습이 계속 방패로 남아주었으면, 하고 엘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렴풋한 불안이 엘리의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조엘은 말없이, 그리고 수없이 엘리를 지켰다. 조엘의 눈에 보이는 엘리가 굳이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어떤 고통이, 자신의 그것과 닮았다고 느끼면서. 엘리는 대체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모든 것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처럼.
그런 엘리에게 잃어버린 딸 사라가 겹쳐 보였다. 사라와 엘리는 닮은 점이 많았다. 그 예민함. 영민함. 보이지 않는 내면의 폭주. 사라가 엘리의 나이쯤 됐다면 지금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고 이렇게 행동할까, 모처럼 기분이 좋은지 재잘거리는 엘리의 꿈결 같은 말소리를 들으며 조엘은 생각했다. 이따금씩 엘리가 아이처럼 웃어 보일 때가 있었다. 조엘이 보는 그 웃음은 환하고 밝으면서도 동시에 슬펐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슬퍼하는 사이였다. 조엘은 그녀의 방패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조금 더 자주 보고 싶었다. 사라를 잃고부터 텅 비어있던 조엘의 눈동자에 어느 순간부터 빛이 감돌았다. 그 무렵 엘리의 얼굴에 드리워있던 그늘의 면적도 훌쩍 줄어있었다. 엘리는 문득 더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정을 함께하며 그들은 자주 다쳤고 다퉜고 또한 자주 웃었다.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험난한 전투에서 때로는 누군가 상처 입고, 그러면 누군가는 치유하고, 돌보고, 의존했다. 둘만의 세계가 생겼다. 누군가는 이 여정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엘이 어떤 일에 몰두하고 있던 사이, 엘리가 홀로 어디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전투를 치르러 가는 것 같은데 조엘로서는 말릴 수도 함께할 수도 없었다. 알아서 하겠다며 훌쩍 떠났던 엘리는 상처투성이 몰골로 돌아와 씩 웃어 보였다. 그날밤 둘은 모닥불을 피우고 술을 마셨다. 조엘은 그녀가 겪고 온 전투 내용을 듣고 기가 찼다. 사나운 척하는 고양이 새끼인 줄 알았던 엘리가 나름대로 용맹한 호랑이 새끼였다는 사실을 조엘은 알게 됐다. 안심이 됐다. 동시에 이대로 호랑이 새끼가 자라 언젠가 울타리를 부수고 떠나버릴 것 같은 작은 두려움 비슷한 감정도 얼핏 스쳤다.
"너는 사방에 독을 뿌리고 다니는 독개구리 같아 엘리."
"아저씨가 더 독개구리처럼 생겼어요."
둘은 큭큭 웃었다. 그날의 눈보라 치던 밤은 기묘하게 따뜻했다.
그날 밤 격리구역 생활동 3 구역, 조엘이 잠들어 있던 A-7호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조엘의 조용하던 세상에 다시 한번 폭발이 일었다. 눈앞에 사라가 있었다. 조엘의 커다란 시야 앞에 사라가 보였다, 사라졌다, 다시 보였다. 5년 전 잃어버린 소중한 딸. 딸이 살아서 내게 왔다. 조엘과 꼭 닮은 사라의 커다란 갈색 눈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사랑, 그리고 어떤 낯섦이 있었다.
"나 여기까지 혼자 오느라…. 아빠는 좋아 보이네."
조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사라를 힘껏 껴안은 채 소리 없이 울었다. 그 모습을 엘리가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 셋이 함께 생활하게 됐다. 얼마 후 엘리와 조엘은 사라가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엘은 그제야 엘리를 데리고 왔던 애초 여정의 시작과 목적이 뒤늦게 떠올랐다. 엘리를 파이어플라이 연구소에 넘겨 무기와 보급품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 건 없어도 된다. 딸 사라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면역자인 엘리의 뇌조직을 이용해 사라를 살릴 수 있다. 사라뿐 아니라 남은 인류 전체를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엘리는 죽는다.
"남은 제 인생에 아저씨가 꼭 필요할 것 같아요." 언젠가 엘리가 말했다.
조엘은 그 말을 듣고 괜히 딴 소리를 했다.
아빠를 잃고 떠돌며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지난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사라는 조엘의 곁에서 어리광을 부렸다. 엘리는 그런 부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사라는 조금씩 감염의 증상이 발현되고 있었다. 조엘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말수가 줄었다. 한숨이 늘었다. 엘리는 그들의 변화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조엘은 엘리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라에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엘리는 조엘의 커다랗고 다정한 갈색 눈을 물끄러미 봤다. 사라가 격리구역에 찾아온 그날 밤 이후, 조엘은 엘리를 이전처럼 대하지 않았다. 전처럼 대하지 못했다. 엘리는 조엘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면서도, 조엘로부터 받아 왔던 모든 것이 어쩌면 사라의 대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전부가 아닌 것도 알았다. 그리고 사라에게 조엘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도. 조엘 곁에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조엘이 그녀에게 해주었던 약속들이 떠올랐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줬던 약속들. 너를 지켜줄게, 나는 네 편이야. 했던 그 무수한 약속들. 엘리의 삶에 방패가 되어줄 것 같았던 그의 뜨겁고 커다랗던 마음이, 연소된 장작처럼 까맣게 타 재로 변했다. 조엘의 존재만으로 견고해졌던 안심도 허무한 재로 변해 공중에 나부꼈다. 엘리는 여정을 이어갈 이유를 잃어버렸다.
"아저씨, 이제 말로 하세요. 그만 앓고."
"뭘."
"…주무세요."
기온이 몹시 떨어진 어느 밤. 생활동 복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공기가 차고 무겁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엘리는 그곳에 깨어있었다. A-7호실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조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대화하고 있었다. 복도 끝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오래된 페인트 틈을 따라 가늘게 떨렸다.
“인류를 구해야죠. 당신 딸도요.”
엘리는 눈을 감았다.
‘당신 딸.’
문틈 사이로 조엘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 숨이 낮게 끊어지며 흔들렸다. 엘리는 그 소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감염자들에게 공격당할 때, 엘리를 감싸 안고 고르던, 조엘의 익숙한 숨소리였다.
남자가 말했다.
“이제는 행동하셔야 합니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엘리는 조엘의 커다랗고 다정한 갈색 눈 대신, 그의 등을 떠올렸다. 감염자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자신을 가리고 보호해 주던 넓은 등을. 그리고 그 등이 이제는 다른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은 제 인생에 아저씨가 꼭 필요할 것 같아요,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엘리는 홀로 엷게 웃었다.
“다 거짓말이었네.”
엘리는 복도를 조용히 떠났다.
다음날 아침. 조엘은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격리구역 어디에도 엘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신없이 엘리를 찾아다녔다. 사라는 그런 아빠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조엘은 엘리의 침상 밑에서 그녀가 남겨둔 쪽지를 찾았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 크리스마스 선물. 괴로워하지 마세요.
2025. 12. 25. 유일한 감염 면역자의 뇌로부터 추출해 만든 백신과 치료제로 전 인류는 생존했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거리에, 희망찬 캐롤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