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사람들을 위한
우리 믿을 구석 비빌 언덕 검사님은 내게 사건관계인을 향해 과도한 감정 이입을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지시킨 바 있다. 너무 예쁘고 연약하게 보이는, 갓 100일 된 어린 자식을 두고 징역을 살 위기에 처한 한 여성 피고인의 오열을 보았던 날, 재판이 끝난 이후에도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눈물을 그렁그렁 얹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내게, 우리 검사님은 특유의 잘생기고 냉랭한 얼굴로 내 주의를 환기시키고서는, 누구 피고인의 출국금지 기간 연장을 제때 한 것이 맞느냐며 나를 현실로 질질 끌어오셨다. 저 피고인의 사정이 딱한 게 절대 아니다. 저 눈물은 반성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에 대해 2차 가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저 정도 감정에 휩쓸려 넘어가주면 범죄자는 나중에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사회는 더 망가지고 만다. 암을 초기에 치료해야지, 그냥 방치하면 더 걷잡을 수 없어진다. 재판을 마치고 함께 돌아오는 길에 검사님은 단호하면서도 진지하게 말씀해주셨다.
우리 검사님은 무척 동안이기 때문에 나는 내심 검사님을 또래 친구라 여겨왔다. 컴퓨터 활용법 등 검사님께 수시로 배우는 점은 많았으나 사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검사님을 어른이라고 느낀다거나 특별히 존경과 의지를 하진 않았었다. 하지만 그날의 재판을 마치고 함께 돌아오는 길에 나눈 대화에서, 또래친구로 여겨왔던 검사님의 사명감과 원칙과 소신과 정의감을 느꼈고, 그게 나름대로 멋지고 감명깊었다. 그래서 종종 검사님께 직접 소시오패스라고 비난했던 점에 대해 약간 반성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검사님을 믿게 되었고 내 마음에 믿을 구석 비빌 언덕 검사님으로 저장했다. 검사님은 나랑 대화를 하다 보면 마치 밥솥 뚜껑처럼 머리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믿을 구석 비빌 언덕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둔 검사님 답게 내가 경험이 미천한 계장으로서 필요한 각종 자료와 수사 관련 도움 요청을 하면 마치 유치원생 입에 이유식을 부어주듯 성심성의껏 지식과 노하우를 공급해주신다. 약간의 타박과 욕을 참는 뉘앙스를 풍기시긴 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런 검사님께서 오늘 느닷없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월드뱅크 은행에 가게 되었다고 통보하셨다. 잠시 작은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왜냐면 원래 우리 검사님도 나를 떼놓고 멀리 가버리셨기 때문에 이제 내게 남은 믿을 구석 비빌 언덕 검사님은 검사님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아버지 부장님도 옆에 계시지만 부장님은 가족이나 다름없고 나는 상사의 외모도 약간 꽤 본다. 이번 달에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월드뱅크 은행으로 가게 되신다는 검사님의 통보에 나는 즉시 슬퍼했고, 그 반응을 본 검사님은 이내 뻥이라고 하셨다. 농락당한 것에 분개한 나는 검사님께 혼날까 봐 아주 오래 전부터 참아왔던 말을 마침내 꺼내버리고 말았다. 검사님 외모는 영업사원 같으세요. 어느 분야인지도 말하고 싶지만 거기까진 꾹 참을게요. 했더니 검사님이 스스로 물어보셨다. 정수기? 차? 폰?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뒤에 두 개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기왕 말한 김에 대학생 때 종로에서 제 손목을 잡아 끌고 갔던 삐끼 이미지도 좀 있다고 했다. 앞머리에 뭘 발라서 넘긴 모습이. 검사님이 화를 낼까 봐 급히 수습하려고 보통 영업사원은 잘생긴 사람이 하는 거니까 좋게 생각해 달라고 했고, 다행히 검사님도 좋게 생각하시는 듯했다.
어제 주거침입 죄로 입건된 피의자를 조사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하며 눈을 맞출 때마다 내 눈에서 자꾸만 꿀방울을 떨어트리게 만들었던 그가 조사를 마치고 간인을 하던 과정에서 그의 크고 두툼한 손이 내 손을 스쳤고 그의 손끝에 묻은 인주가 내 손끝에 닿아 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를 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내 앞에 앉기 전까지 단 한 건의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는 선량한 청년이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전단지를 붙였을 뿐이다. 퇴근 후 현관문에 붙어있는 전단지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고소한 사람 덕택에 성명불상의 피의자로 입건이 되었던 것이고, 나는 그 성명불상 피의자를 찾아내 내 책상 앞 피의자용 의자에 앉혔다. 어제 검찰청으로 출석을 요구하는 전화에서 그는 몹시 무서워했다. 그가 내 앞에 앉아 조사를 받던 도중 형사조정을 받으러 온 것으로 추정되는 할머니가 핸드폰을 사용할 줄 모른다며 사무실에 난입해서 도움을 요청했고, 두려움에 떨며 조사를 받던 그 선량한 청년은 그 와중에 할머니를 도와주며 할머니, 이렇게 하시면 돼요. 지금 여기에 대고 말씀하시면 돼요. 해서 나를 두 번 반하게 만들었다.
청년은 내게 사과했다. 수사관님은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저때문에 귀한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하다고, 본인이 전단지를 붙여서 스트레스를 받았을 집주인에게도 죄송하다고 긴 반성문까지 남기고 갔다. 보통 검찰청에 조사를 받으러 오는 피의자들의 범죄경력을 조회해 보면 칸이 빼곡하다. 수 페이지로 줄줄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텅 비어있는 그의 범죄경력 조회내역이 내 연민을 자극했다. 나라의 큰 도둑들, 정말 악한 사람들은 당당하게 조사를 받는다. 증거가 명백히 있음에도 억울하다고 한다. 도리어 화를 내기도 한다. 오늘은 청년을 고용했던 전단지 홍보업체 아주머니를 불러서 조사했다. 괜히 본인 때문에 건실한 청년 앞길을 막은 것 같아 너무 미안해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내가 시킨 건데 처벌을 나만 받게 해 줄 수 없냐고 물었다. 청년에게도 나에게도 너무 미안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주거침입 교사범, 청년은 주거침입범으로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어제 오늘 두 피의자 조사를 마친 내게 부장님은 수사결과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셨다. 나는 그 선량한 사람들의 주거침입, 주거침입교사라는 죄명을 경범죄처벌법위반으로 바꾸기 위해, 부장님의 마음 속 결정인 기소유예를 혐의 없음으로 바꾸기 위해 야근을 하려고 한다. 유사 사건 판례를 뒤지고, 청년과 아주머니가 단지 현관문에 전단지를 붙임으로써 해쳤다는 주거의 평온과, 선량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앞으로 평생 갖고 살아가야 할 범죄기록 중 어떤 법익이 더 보호될 가치가 있는지에 관한 정성스러운 보고서를 작성할 것이다. 나는 결정권이 없는 한낱 수사관이지만, 우리 회사가 존속할 남은 기간만큼은 선량한 사람들에 대해 계속해서 연민하고 헌신하고 싶다. 우리 믿구비언 검사님의 조언은 여전히 마음에 새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