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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를 든 아저씨

그의 필터로 본 세상

by Ubermensch





나는 중요경제범죄를 조사하는 부서의 수사관이다. 이 부서에 온 지 3개월 정도 되었고, 구속된 피의자를 대면 조사한 것은 오늘로써 세 번째다. 첫 번째 피의자는 몽키스패너를 들고 어린아이 머리를 내리친 적 있는 상습절도범 할아버지였고, 두 번째 피의자는 환각의 조선족 3명과 시비가 붙어 길거리에서 칼을 휘두르다가 체포된 피의자였으며, 오늘 온 피의자의 범죄 사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보행기를 끌고 다니는 90세 할머니를 멱살을 잡아 밀어 넘어뜨리고 집에 있는 도끼를 가져와 할머니를 내리치고 위협하다 구속된 피의자이다. 각자 망상장애, 환각, 환청등의 문제가 있었다.


나는 경제범죄를 조사하는 부서의 수사관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경제 범죄만 저지르는 피의자만 조사하시는 앞자리 계장님은 내게, 이번에도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배당되면 내 기운이 끌어모으는 거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제발 정상적인 사기꾼이 왔으면 했던 내 바람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우리 사무실 식구들이 정식으로 함께하는 점심은 매주 목요일이다. 오늘 오전 조사를 앞두고 부장님이 갑작스럽게 점심을 제안하셨다. 아침부터 나는 맨날 무기 든 피의자 사건만 배당받아서 책상 위 위험한 물건을 치우는 일도 지긋지긋하다고 삐죽거렸기 때문이다. 부장님께서는 책상 위 내 명패도 치우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시고선, 내가 좋아하는 옥소반 스키야키 전골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점심을 먹고 난 이후 내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 한판이 들려있었다. 생일도 아닌데. 사무실로 돌아가는길에 조잘거리던 도중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띤 채 말이 튀어나왔다. 저는 회사에 다니는 게 너무 행복해요.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차고 꽁꽁 묶여 들어온 아저씨를 내 책상 앞에 앉혀두고 이야기를 들어본바, 범행의 이유는 구체적이었다. 이재명 추종자로 추정되는 어떤 세력이 보행기에 의존해 다니는 90세의 치매 걸린 할머니를 앞세워 본인을 피의자로 만들기 위해 상황을 설계한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본인이 백악관의 바이든과 트럼프, 그리고 청와대의 박근혜에게 서면을 보낸 적이 있고, 2016년경 중국발 전염병에 대해 사전 예언을 한 적이 있으므로 국가에서 본인을 예의주시하게 되었고, 그래서 음해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조사 전 사건 기록을 보고 이번 피의자에게는 연민의 구석이 전혀 없을 줄 알았다. 앞서 나열한 이야기를 굳게 믿고 내 눈을 맞추며 진술하는 모습을 보니 이번 사건은 개인의 악의와는 전혀 무관한 범행임을 알 수 있었다. 화룡점정으로 이전 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굳이 내가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은 본인의 입사정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런 걸 보여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하며 수줍게 입을 벌려 이가 숭덩 빠진 입속을 보여주자 나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동정하고 말았다. 우리 믿을 구석 비빌 언덕 검사님은 내게 피의자를 쉽게 믿고 동정하는 버릇을 버리라고 단단히 말해주신바 있다.


이번 피의자는 서울 최상위권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시절 교수와 학생들이 본인을 소외시킨 것에 불만을 가져왔던 중, 본인을 무시하던 어떤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과 닮은 여학생을 칼로 베 실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었다. 이건 이 사람의 악의가 아니다. 실수도 아니다. 어떤 이유로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에 필터가 씌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필터로 거쳐 본 세상을 굳게 믿고 있다. 90세 할머니의 멱살을 잡아 밀치고, 도끼로 위협한 사실은 스스로도 정말 잘못한 거라고 했다.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특정 세력이 본인을 음해하기 위해 할머니를 앞세워 본인에게 수시로 시비를 걸고, 훔쳐간 물건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특정하기 힘들지만 집에 계속 도둑이 들고, 경찰도 본인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세상의 관점과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관점에서는 그가 보고 믿는 그대로 진술한 것임이 느껴졌다. 내 생각에 안타까운 지점은 재판을 받고 형기를 마치고 나온다 한들, 그를 음해하려는 세상의 특정 세력이 갑자기 태도를 바꿀 가능성이나, 그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박근혜가 그를 도와줄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포함한 세상 모든 크고 작은 일상이 본인을 음해하기 위한 조직의 감시와 위해 시도로 느껴질 것이기에 그는 늘 의심스럽고 불안할 것이 틀림없다.


조사를 마치고 방 식구들이 모여 조사 후기를 나누며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내겐 어떤 팬이 선물해 주신 좋은 차가 있었다. 우리 부장님은 멋진 티팟을 가지고 계셨다. 옛날에 독일에서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여태껏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부장님이 가진 멋진 티팟에 내가 가진 좋은 차를 우리기로 했다. 부장님은 요즘 그 멋진 티팟에 촛불을 켜고 3,4시간씩 차를 우려 내 머그컵에 따라주신다. 부장님은 얼마 전 27년 근무생활 중 지금이 가장 편하고 즐겁다고 말씀하시며 두 팔을 흔들어 춤을 추셨다. 나도 10년 근무하는 동안 지금 이곳이 제일 마음 편하다. 비록 회사가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오늘 좋은 사람들과 딸기 생크림 케이크 한 입, 좋은 차 한 모금을 나누어 마시며 사건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소소한 행복이 조금만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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