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 공간
우리 부장님의 집무실은 525호다. 나와, 523호 부장실 소속 계장님과, 겸방 업무를 맡는 예쁜 아기 실무관님 이렇게 여자 셋이 가운데 524호에 근무한다. 오늘 아침에 모처럼 일찍 출근을 했다.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잤다. 댓글 하나를 잘못 보고 몇 시간을 울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됐다. 평소 앞자리 계장님은 8시 50분경 출근하시고, 우리 셋 중 실무관님이 가장 먼저 출근하시지만, 오늘은 실무관님이 연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모처럼 8시 45분경 도착한 나는 아무도 없으리라 예상하고 열쇠로 사무실 문을 땄다. 그런데 문이 안 열렸다. 열쇠를 다시 돌리고 문을 열었더니 코앞에 부장님이 계셔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장님의 집무실은 525호이기 때문이다.
부장님은 우리 사무실 정수기에서 물을 뜨고 계셨다. 내가 부장님 사무실에 정수기를 놓아드리겠다고 4번 이상 제안했는데 거절하시고 하루 10번 정도 물을 뜨러 오신다. 총 30번 이상 우리 사무실에 오신다. 사실 거의 하루의 반 이상 내 인근에 서계신다. 얼마 전 부장님이 내게 물었다. 이방 생수통을 누가 맨날 갈아 끼우는 줄 알아? 나는 대답했다. 생수업체 아저씨가 하겠죠. 부장님은 말씀하셨다. 그동안 내가 다 했어. 나는 리액션을 했다. 오 대단하시네요. 부장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누가 이렇게 물을 많이 먹는 거야. 나는 대답했다. 부장님이 제일 많이 드시는 것 같은데요.
어느 날 정수기 물이 떨어졌다. 우리 여자 셋 중 가장 어리고 힘이 센 실무관님이 물통을 번쩍 들더니 갈아끼웠다. 때마침 그 장면을 목격하신 부장님이 아 그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하며 죄지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하셨다. 아기 실무관님은 부장님을 향해 쏘아붙였다. 부장님이 안 갈아주시니까 제가 했잖아요. 하고. 부장님은 아니 내가 하려고 했는데. 하며 멋쩍어하셨다. 10년전 0.1톤에 육박하는 거구의 남자 선배님 세 명이 수습 수사관 시절 체중이 45킬로밖에 안 나갔던 내게 생수병을 갈아보라고 시킨 후, 그 미션을 성공하지 못하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사관이라고 했다. 술에 잔뜩 취한 나는 그 선배님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꺼내보였다. 당시 몹시 군대식이던 회사에서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다. 그 다음 날은 잔뜩 혼나고 울었던 나를 위한 화해의 술자리가 생겼고, 만취한 나는 동일한 선배님들을 향해 다시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나는 하염없이 혼나고 울었다.
오늘 아침 부장님이 직접 내린 커피를 가지고 편하게 앉아있던 내 컵에 잔뜩 따라주시며 말씀하셧다. 첫 잔은 다 줄게. 난 2차로 마셔야지. 이 커피가 투썸 커피보다 더 맛있더라고. 왜 비교 대상이 굳이 투썸인가요, 하고 내가 물었다. 부장님은 당연하다는 듯 아 거기만 멤버십 할인이 되거든. 하시며 내게 내려주시고 남은 원두를 재활용해 부장님용 2차 커피를 추출하셨다. 잠시 후 부장님은 치토스 봉지를 까서 내 손에 와르르 부어주신 뒤 와작와작 드셨다. 그러다 치토스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나는 다급하게 부장님 그거 주워.. 애석하게도 내 문장의 마무리보다 부장님의 동작이 더 빨랐다. 부장님은 땅에 떨어진 치토스를 재빨리 입에 넣고 와작와작 씹어드셨다.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가문이야. 하고 부장님은 평소 수도 없이 말씀하셨다. 내가 30분 지각을 하던 날 먼저 출근하신 부장님이 내 자리에 서서 쾌활하게 인사를 건네시는 순간에도, 나는 뻔뻔하게 부장님 저는 이 중요경제범죄조사단에 있을 자격이 없는 수사관입니다. 제 본소속인 형사 6부로 돌려보내세요. 하고 선빵을 날렸다. 부장님은 얼마나 피곤했으면 늦잠을 자겠어. 우리 ㅇㅇㅇ파 42대손은 잘못이란 걸 할 수가 없어. 하셨다. 부장님은 ㅇㅇㅇ파 41대손이다. 내게 호부를 허용하신 지 오래다. 그렇게 우리 가문의 혈통과 뼈대를 역설하셔 놓고 땅에 떨어진 치토스를 눈깜짝할새 주워 드신 부장검사님을 보니 기가 막혔다. 나는 부장님께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부장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장님은 뭐냐고 물었다. 앞으로 다시는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드시지 마세요. 같은 ㅇㅇㅇ파 자손으로서 부끄러우니까요.
부장님은 요즘 집주인에게 내쫓기고 전세금을 돌려받지도 못할 주거불안에 시달린다고 하셨다. 자칭 불우 검사라고 하신다. 앞자리 계장님은 내가 풀소유 계장이라고 하신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다 가졌다며. 그러면서 부장님과 계장님은 집이 없는 민달팽이 신세라 처량하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내 등껍질은 다 부서져 비바람을 맞는건 마찬가지라고,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무겁기만 하다고. 제 집 두 개와 차 하나를 합쳐봐야 강남에 사시는 두 분 전세금만도 못하니까 민달팽이 흉내는 그만 내시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의 기구함 배틀이 시작됐다.
나는 겉만 그럴싸해 보이지 속은 다 문드러져있다고 매일밤 목매달아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계장님은 정 그렇다면 내가 엄청난 철학관을 아는데 거기에 한번 가보라고 권해주셨다. 내년에 우리 회사도 망하고, 나도 빚을 갚아야 하기때문에 강제로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이므로 계장님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한번 가서 내년의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아보기로 결정했다. 당장 부장님께 저 사주 보러 철학관에 가야 해서 조퇴 좀 하겠습니다, 혹시 철학관 아저씨가 저에게 회사를 떠나는게 좋겠다고 하면 제가 이곳을 그만둘 수도 있으니 업무에 참고하시라는 말과 함께 미련 없이 524호를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