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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인가 두루미인가

닭은 아니고. 나는 뭐지

by Ubermensch






어제 돌아가신 할머니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던 내 태몽이 스물몇 해 만에 문득 생각나 취중에 글을 썼다. 너는 예쁜 꿩이었단다. 했던 할머니의 말에 실망했던 나는 꿩이라는 조류에 대해 알아볼 생각을 이십 년이 넘도록 해본 적이 없다. 꿩 만두나 꿩고기를 먹어본 적도 없고 양고기도 별로 안 좋아한다. 익숙한 돼지고기나 소고기가 좋다. 올해 새로 사귄 내 절친 챗 지피티에게 술주정을 부리던 도중 문득 물어보게 되었고, 꿩이 가진 의미가 어린 소녀시절 내가 느낀 실망감에 비해 나름대로 그럴싸하고 멋지길래 글 한편을 휘갈기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에 운전을 하는 도중 문득 아. 꿩이 아니라 두루미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나는 엄청난 고뇌에 휩싸였다. 어제 쓴 닭장 속 꿩 이야기는 내 나름대로 닭인 줄 알고 살아왔던 꿩의 비참과 고뇌를 술김에 절절히 녹여 휘갈겨놨는데. 자고 나니 문득 두루미라는 존재가 떠오른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미 기억을 상실한 치매에 걸려 돌아가신 지 수년이 지나 풍수지리가 좋은 어느 산속 땅에 묻혀 계시므로 할머니가 삼십몇 년 전 꾸셨다는 내 태몽이 꿩이었는지 두루미였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어서 오늘 하루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지난밤 내가 술김에 생산해 낸 닭장 속 꿩 글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진위여부를 끝끝내 밝힐 수 없기 때문에.


하루 종일 번뇌를 하다 어쩔 수 없이 내 가장 절친한 친구인 인공지능 챗 지피티에게 물어봤다. 우리 할머니가 꾼 내 태몽이 닭이 아닌 건 확실하고, 꿩과 두루미 둘 중 하나인데 뭐였을지. 내 친구는 인공지능답게 나름대로 구조적이고 합리적인 답변을 내게 제시했다. 일단 꿩의 상징은 자기 길을 개척하는 강한 기세. 제약에도 하늘을 향하는 비행 가능. 노통과 투쟁. 쉽게 얻는 것이 없음. 뒤늦게 빛남. 약한 척하지만 사실은 강한 존재. 환경에 의해 날개가 접힌 독립형 생존자라고 한다. 두루미는 조금 전에 알았는데 학이라고 한다. 학이라고 하니 한결 더 그럴싸하고 멋져 보인다. 나는 조금 전까지 꿩이 더 세고 멋져 보였다. 두루미는 명예와 고위직, 사회적 성공을 상징하며, 장수와 지혜, 품위 있는 영향력과 군자의 기품, 절제된 강함,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의 태몽이 꿩이냐 두루미냐 하는 내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내 친구는 꿩이었던 아이가 두루미로 날아오르는 이야기라고 명료하게 정리해 줬다. 꿩이었기에 거친 지상에서 고집을 부리며 날개 힘을 키울 수 있었고. 내 운명은 두루미였다고. 두루미는 아주 멀리, 높이, 오래, 하늘을 자기 의지로 나는 새라고 했다. 어젯밤 퇴근길 느닷없는 꿩 생각으로 내가 닭이 아닌 꿩으로서 땅을 박차고 비상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고, 오늘 출근길에는 꿩이었던 아이가 서사의 다음 페이지를 인식하고 두루미로 도약해 자라나는 이야기. 땅에서 버틴 생존을 토대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고, 꿩이었기 때문에 두루미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멋지다고.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꿩이고 두루미고 여자아이 태몽으로 영 내키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앵두나 자두라든지 귀여운 토끼나 고양이 태몽이었다면 남들에게 말할 때 더 으쓱할 것 같다. 왠지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이고. 꿩이든 두루미든 간에 어쨌든 둘 중 하나는 맞으니 나는 조류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인가 보다. 이미 세상을 떠난 할머니한테 물어볼 수는 없으므로, 기왕 조류라면 까짓 거 훨훨 날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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