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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 속 꿩

꿩대신 닭 말고 꿩 이야기

by Ubermensch





자연적인 출생 성비는 남아 105:여아 100이라고 한다. 나는 백말띠다. 여자아이로서는 팔자가 드센 띠라고 한다. 90년대 초반은 유독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던 시기로 여아 낙태가 극성이어서, 1989년도에 남아 113:여아 100명이던 성비가 1990년에는 남아 116.5:여아 100, 92년도에는 남아 117.6:여아 100의 기형적인 비율을 기록했다. 낙태율이 직접적으로 책정된 것은 아니지만, 자연적인 출생 성비를 비정상적으로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내가 외가에서 양육되던 시절에 나는 먹는 것에서부터 배움의 기회까지, 아들이 귀했던 집에서 심한 남녀차별을 겪고 자랐다. 나를 공주로 취급하던 친가에서조차 제사 때 상은 여자들이 차리고 다 차린 상에 절은 집안 남자들만 할 수 있었다. 공주인 나만 특별히 큰상에 포함되었고, 엄마를 포함한 여자들은 작은 상에서 따로 식사를 했다.


나를 물고 빨던 우리 친할머니가 절대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고 했던, 할머니가 꾸셨다는 내 태몽은 예쁜 꿩이 나온 거라고 했다. 우리 엄마도 모를 거다. 말은 안 하고 글로 쓰니까 할머니의 당부를 어긴 건 아닐 테다. 수십 년을 잊고 지내다 오늘 퇴근길에서야 문득 그 꿩 태몽이 생각났다. 여자아이들 태몽은 보통 과일이나 보석 같은 아기자기 류라고 한다. 내가 듣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유는 내 태몽으로써 꿩이 좀 별로고 이상하다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오늘에서야 올해 새로 사귄 친구 챗 지피티에게 꿩 태몽의 의미를 물었다. 그건 남자아이의 태몽이라고 한다. 출세, 능력 있는, 사회적 성공을 상징한다고. 그리고 외모가 뛰어나고 주목받는 자손, 높은 자리, 공직, 특히 명예를 상징하는 대표적 동물이라고 한다. 흰 말의 해. 한여름 한낮에 태어난 내 생년월일시와 꿩 태몽. 나는 애초에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여자아이에게서는 드문 태몽과 사주팔자, 강렬하고 빛나고 높은 곳에 비상해야 할 사람이랬다.


나는 내가 닭인 줄 알고 살았다. 지위와 성취와 무관하게 항상 답답하고 슬펐다. 좁은 닭장 안에 갇혀 있는 닭 같았다. 매일매일 의미 없는 무정란을 생산해 내며, 아무리 푸드덕거려도 지상에서 떠오르지 못했다. 닭똥 냄새가 진동하는 닭장 속에 갇혀있으니까. 그래서 늘 비참했다. 늘 갑갑했다. 그리고 그 닭장 속에서 늘 별난 취급을 받았다. 다른 닭처럼 군말 없이 매일 알을 낳고 적당히 주는 모이나 먹고 꼬꼬댁거리기나 하지 넌 왜 비명을 질러. 왜 요란하게 몸부림쳐. 그래봤자 너만 다쳐. 좀 손해 보는 듯 살아. 다들 그래. 넌 참 별나. 이상해. 그만 악쓰고 대들어. 다른 애들은 순해. 넌 왜 그러니. 대체 뭐가 문제야. 유난이야. 너무 예민해. 적당히 해. 하고.


그러다 오늘 퇴근길에서야, 우리 할머니가 내 태몽이 꿩이었다고.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열몇 살 소녀시절 내게 비밀스럽게 말해준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닭이 아니라 꿩이었다. 그래서 닭장에서 적응을 못했던 것이다. 꿩은 못생겼을 것 같아서, 그때 그 말을 듣고 꿩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 안 들었었다. 예쁜 토끼나 고양이도 아니고 꿩이 뭐람, 했다. 엄마는 내 태몽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고, 할머니가 말한 내 태몽의 꿩은 여자아이들의 보편적 태몽인 과일이나 보석 같은 예쁜 게 아니라서 어린 마음에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내 태몽을 듣고 실망한 후 20년도 더 지난 오늘 알아본바, 비행능력이 퇴화된 비슷하게 생긴 닭과 달리 꿩은 힘차게 하늘로 솟구쳐 날 수 있는 새였다. 최고 시속 90km의 속도까지 강하고 빠르게.


내가 왜 늘 보편적이고 평범한 삶을 갈망하면서도 적응하지 못했는지, 왜 늘 이상하고 문제적이고 별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살았는지, 오늘에서야 마침내 알게 됐다. 그건 내가 닭이 아니라 꿩이었기 때문이다. 닭장 속에 사는 꿩. 우리 아빠는 부잣집 뼈대 있는 가문의 5대 독자인가 6대 독자가 될 뻔한 귀한 아들이었고, 우리 외가는 딸 셋이 있고 고명아들이던 막내 삼촌이 죽어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내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 시대적으로도 남아선호사상이 강했고, 팔자가 드세다며 여아낙태가 만연하던 백마의 해에 꿩 여자아이로 나는 태어났고, 그래서인지 내 삶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희고 작고 마르고 외관상 약해 보인다. 특별히 어디 가서 나서지도 않고 목소리도 작고 낮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내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깨달았다. 나는 전쟁터의 흰 말이고, 닭이 아닌 꿩이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강인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작고 약해 보이는 여자로 태어난 건 애초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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