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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다혜 Mar 13. 2024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는 글

책 <에세이즘> 독서 기록

2024년 목표 중 하나였던 글쓰기 수업 듣기를 시작했다. 나의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평가 받는 일이 두려워서 합평이니 피드백이니 하는 것을들 피해왔는데, 이제는 마주해야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안전하게 느껴질 것같은 글쓰기 수업을 찾아가서 그런지 수업이 즐겁고 기다려진다. 특히,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사람들과 좋았던 문장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느슨한 독서모임같아서 좋았다.


처음으로 함께 읽은 책인 <에세이즘>, 그리고 좋았던 문장들!

15~17p

*이런 글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글 이름이 무려 에세이다.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는 글.에세이에는 노력, 시도, 시험이라는 뜻도 있다. … 나의 팬심을 자극하는 이 에세이라는 것의 범위, 그 속성 혹은 경향성의 범위가 어디까지일지에 대한 이야기도 뒤에서 하게 되겠지만, 당장 여기서는 내가 에세이에 바라는 것이 그 결합, 정확한 찌름과 찔리는 아픔의 결합이라는 이야기로 충분할 것 같다.

→ 에세이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뜻도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에세이라는 형식에 굉장히 걸맞는 뜻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찌름과 찔리는 아픔의 결합'이라는 표현도 인상깊었다. 내가 힘들 때마다 에세이를 펼치는 것은 나조차 모르고 있는 나의 어떤 부분을 찔러 각성할 수 있게 만들어주길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170~172p

사실 손택이 원했던 장르는 그녀의 일기가 욕망을 고백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손택 스스로 내가 되고 싶은 작가가 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고, 내가 살고 싶은 사람으로 살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고 자신의 일기를 통해 고백함으로써 말이다.

손택과 워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는 곳이었던 일기가 본인들 후기 이력에서 최고의 작업으로 꼽힐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혼자라는 것, 내가 이 일기의 유일한 독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걸 안다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만큼 더 강하다는 느낌, 여기에 뭔가를 써넣을 때마다 더 강해진다는 느낌이다.”

→ 어떤 글을 써야할지 모를 때, 오히려 일기에 솔직하게 써내려간 글에서 진짜 내 모습, 내 방식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독자가 나뿐인 일기를 쓸 때조차 독자를 의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최근엔 그런 의식을 내려놓고 하고 싶은 말을 솔직하게 모두 써내려갔더니 정말 후련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다 내려놓고 밑바닥의 나를 마주할 때 생겨나는 마음의 단단함, 나만의 개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3p

내가 가장 감탄하게 되는 에세이들을 보면, 어느 한 가지에 대해, 어떤 시기나 장소, 무언가의 특징이나 요소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또는 매우 꾸준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글들인 것 같다. 더욱이 그 에세이가 자신의 방식으로 관심 기울이기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면, 한층 더 감탄스럽니다. 이러한 에세이는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를 정형화하기도 하는데, 그 순간에 작가는 좋든 나쁘든 자신이 장시간의 관찰이나 고강도의 관찰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고, 세상을 이 한 점 혹은 저 한 점으로 좁혀서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게 된다.

→<크로와상 사러가는 아침>을 읽으며 같은 생각을 했다. 일요일 저녁, 바닷가에서 책 읽기, 가을 스웨터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 장소, 시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생각해 쓴 에세이들이 모여있었다. 흔한 주제여서 나도 쓰겠는데? 싶지만 막상 쓰려하면 그런 글을 쓰기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된다.

218p

예컨대 글을 쓸 때에도 나는 에세이, 기사, 리뷰를 쓸 때는 물론이고 단행본을 쓸 때조차 철저 한 계획 없이는 아무것도 못 쓰는 사람, 글이란 세상으로 내보내지기에 앞서 풀이될 수 있고 풀이돼야 하는 수식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항상 의문이 었다. 다르게 쓸 수는 없을까? 다르게 살 수는 없을까? 다르게 살려면 어떤 작가를 읽어야 할까? 어떤 책을 읽어 야, 그중에서도 특히 어떤 에세이를 읽어야 이 상황을, 이 런 나를 바꿀 수 있을까? 내 독서 인생에서 어떤 시기에는 같은 에세이들, 같은 기사들을 되풀이해 읽었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읽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니 그 당시의 생각으로도, 내가 글에 요구하는 감정적, 지적, 실존적 무게가 그런 글들에 항상 다 실려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 행복한 시기에 읽었던 책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힘들었던 시기에 읽었던 책들은 또렷하고 생생히 기억이 난다.그 책에 의지해 그 시기를 건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 다시 읽어보면 이 부분에 왜 그렇게 감동을 받았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 경우도 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 다른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책을 읽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도 하다.

222p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내가 의지했던 책들로부터 순전하고 실질적인 위안을 얻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위안을 얻고 싶다는 것 또한 책을 읽는 하나의 이유라는 사실을, 긴 세월 쌓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44p 옮긴이의 말

자기 계발서가 젊고 건강한 몸을 위한 책이라면, 에세이는 늙고 아픈 몸을 위한 책이다. … 성장할 영혼을 가진 독자는 에세이에 끌리지 않는 것 같다. …

<에세이즘>은 '굳이 왜?'라는 질문에 대답해 주진 않지만, 대신 그 질문이 오장육부를 훑고 지나갈 때 정신 줄을 놓지 않을 비법은 전수해 준다. 그 비법 중 하나는 마디로 내 여생의 플레이리스트 만들기. '위안'이 필요한 시점이 왔을 때(그 시점은 책에서 점점 더 자주 닥쳐온다) 브라이언 딜런은 자기가 읽었던 책의 문장들을 불러내 그 기억의 파편들로 자신의 불안과 절망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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