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독서 기록
글쓰기 수업 3강, 수업을 위해 읽은 책은 이소진 저자의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이다.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라는 부제를 보고 나랑은 큰 관련이 없는 이야기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책을 열어보니 거의 내 일기장 수준으로 나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적혀있어 놀랐다. 어떤 이야기들은 내가 겪은 이야기와 너무 비슷해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렇게나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도 잘 견뎌내고 자살 생각을 하지 않은 것, 자살을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읽으면서 가장 많이 사로잡힌 생각은 신자유주의 아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였다. 일이 뭐길래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 걸까, 이 정도면 거의 일하기 위해 태어나고 자라나는 생명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삶에 일이 비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고 있는 요즘에 읽기 딱 좋은 책이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청년여성들에게, 이 책의 저자가 하는 말처럼 너무 당신 탓을 하지말라고, 모든 문제들 중 극히 일부만이 당신의 몫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15p 이런 '빠른' 시대에는 어떠한 것도 장기적 안정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때그때 닥쳐오는 파도에 서핑하듯 올라타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 된다. 지금의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는 사람은 뒤처진다. …사실 그러한 '끈기 없음'이야말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나름의 생존 전략이다.
→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화한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그 변화를 따라가야하며 따라가지 못 하면 뒤처진다는 생각이 우리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 같다.
86p 청년여성들이 처한 노동불안정성은 노동위험을 초래한다. 불안정한 노동은 가족 바깥의 생활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하거나, 일시적 독립을 이루더라도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결국 가족 내로 회귀하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노동위험에 처한 청년여성들은 자신이 언제까지 1인가구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며, 언젠가는 가족에게 의존해야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 첫 독립을 준비하던 때가 생각났다. 스무살이 넘으면 자연스럽게 독립을 하는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결혼 혹은 해외/타지역으로의 근무지 이동이 아니고서야 1인가구 생활을 시작하기 어렵다. 애초에 자신이 원할 때 독립을 할 수 없고,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독립을 할 수 있는 가정도 많이 봤다.
본가가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했다고 하면 의아해 하는 반응들이 자주 돌아왔다. 가족끼리 무슨 문제가 있는지, 왜 독립을 한건지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 자란 성인으로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하여 내가 나 자신을 책임지는 1인분의 삶을 꾸리는 일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많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청년 여성들이 1인 가구 생활을 시작하지 못 하는 이유에 노동 위험뿐만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높은 집값, 높은 비용에 비해 현저히 낮아지는 집의 퀄리티(5평 남짓의 원룸 등), 동반되는 고물가의 생활비용, 집주인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는 전세사기의 위험성, 복잡한 계약 등 여러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20 자발적인 헌신과 인적자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만이 노동자의 독립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러한 이직이 오히려 개인의 전문성을 향상하기에 역설적으로 노동자의 지위는 안정화된다.
… 반대로 한 회사에서의 장기근속은 경험의 누락, 즉 인적자본을 개발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도 있따. 게다가 변화와 성장을 통한 자아실현이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의미화되는 현실에서 장기근속이 내포하게 되는 '고여 있는 삶'은 신자유주의가 설파하는 정상성 범주에서의 이탈을 야기하여 개인의 삶에서 행복의 가능성을 제거한다.
159p 이처럼 청년여성들에게 '쉼'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 아니라 '뒤처짐의 시간'으로 의미화 된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불안은 이들을 쉬지 못하도록 만들며, 노력하는 와중에 낮아지는 생산성은 다시 '게으른 자신'에 대한 혐오로 전환된다. 게다가 노력이 언제나 성과라는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최근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서 자주 듣는데, 가장 기묘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100세 인생에서 퇴사하고 생길 고작 1~2개월의 공백을 나 포함 많은 청년 여성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잠깐의 시간 쉰다고해서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쉬는 동안 뒤처질 시간 그리고 추후 재취업을 할 때 면접관들이 공백을 바라볼 시선들이 무서워서 섣불리 퇴사를 결정하지 못 한다. 번아웃에도 쉬지 못 한 상태로 퇴사하지도 열심히 일하지도 못하는 상태는 자기혐오 상태로 이어진다.
171p 노력에 대한 강박, 성과를 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서사화된다는 사실은 최근의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균열을 내기보다 능력주의에 대한 강한 동의를 기반으로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결합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적 관점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 현재 한국의 청년여성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규정하는 영역은 노동영역에 한정된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박지를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지금의 청년 여성들은 노동위험이 생애 전반의 존재론적 불안으로 확장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규정하는 영역이 노동영역에 한정된다는 말이 띵하게 울렸다. 최근에 하던 생각과도 많이 닿아있었다. 일터에서 인정받지 못 하면 내 삶이 인정받지 못 하는 것인가? 일이 아니더라도 친구, 가족, 애인, 취미, 글, 여행 등 나의 삶에는 많은 부분들이 있는데 '일'의 비율이 유난히 비대하게 커져있는 기분이 들었다. 일의 비율이 이렇게 커지게 된 데에는 능력주의에 대한 나 자신의 강한 동의 그리고 신자유주의 통치성 아래에 '힙한 트렌드'로 여겨지게 된 갓생 유 등의 영향, 공부 - 일로 이어지는 인정욕구 등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83 나는 나를 탓하지 않는다. 억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억울함을 뒤로 미루고, 다시 같은 일을 겪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우리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 모든 건 당신의 탓이 아니다. 당신의 탓이라고 여기는 그 모든 것 중에서 아주 조금만이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