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릴 수 있는 채소로 지금의 행복을!
독립을 한 지 1년이 넘어가고 있다. 가족들과의 본가살이, 룸메이트와 교환학생 기숙사, 해외인턴 동기들과의 숙소 등 여러 라이프 스타일을 경험해 본 후, 드디어 온전히 혼자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다양한 시도를 해보며 나에게 딱 맞는 생활 루틴을 단단하게 세우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쳤고 생각보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설거지, 청소, 빨래, 정리 등 내가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나만의 사이클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중 가장 사이클이 잡히지 않았던 부분이 요리다.
지금까지 간단한 샌드위치, 파스타, 라면 등의 요리만 해왔던 사람이고 어느 계절에 어떤 식재료가 제철인지 부모님이 챙겨줘야 비로소 알게 되는 생활을 해왔다. 부모님과 떨어져 해외에 있을 때도 냉동식품이나 가공식품을 주로 사용하거나 밖에서 사 먹는 경우가 많았기에 제대로 된 요리를 해본 경험이 많지는 않았다. 때문에 처음부터 요리 습관이 잡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독립 첫 달은 모두가 그렇듯이 큰 포부를 가지고 이것저것 식재료를 구입해 요리해 먹겠노라고 다짐을 했지만, 그 결심은 얼마 되지 않아 무너져갔다.
몸과 마음이 지친 날에는 아무리 의지를 다 잡아도 부엌에 설 수 없었다. 손가락을 겨우 움직여 음식을 주문하고, 대체로 1인분이 넘는 양의 음식을 배달받았다. 다 먹지 못한 음식은 그렇게 냉장고로 들어갔다. 냉장고는 채소가 아닌 배달음식으로 채워져 가고, 사실 음식은 그렇게 맛있지 않았고, 한 번 시작된 무기력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또 다른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지친 날이어도 나를 위해 채소를 다듬고, 적당한 양의 음식을 직접 요리해 먹는 것, 그리고 이 과정을 지속가능하게 해 나갈 수 있도록 에너지가 있는 날들에 미래의 나를 위한 준비를 해두는 것이 나의 건강한 삶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씩 깨닫고 있다. 이런 루틴을 만들기 위해서는 루틴을 즐겁고 편리하게 만드는 준비물이 필요하다!
못생기거나 크기가 너무 크고 작다는 이유로 버려질 위기에 처한 친환경, 유기농 농산물을 배송받아볼 수 있는 구독 서비스 "어글리어스". 내 요리 루틴 1등 공신이다. 사용한 지 딱 1년이 되어간다. 아직도 왜 크기나 모양 때문에 멀쩡한 채소들이 왜 버려져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매주 오는 채소들은 전혀 "어글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2주에 한 번 1~2인용 박스를 받아본다. 배송되는 주의 월요일 어떤 채소가 배송될지 알려주고, 내가 선호하지 않는 채소는 제외시킬 수 있다. 최근 서비스가 더 업그레이가 되어서 목록에 없는 채소도 재고가 있다면 추가로 주문할 수 있고, 받기 싫은 채소를 더 유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채소 소진을 다 못 했다면 배송일을 미룰 수도 있다.
어글리어스의 장점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데,
1.그 계절의 친환경, 유기농 제철 채소를 알아서 보내준다.
2.1~2인분 정도의 소량으로 보내준다.
3.그 채소들을 어떻게 활용해서 먹으면 좋을지 레시피도 보내준다.
4.버려질 뻔한 채소의 "구출 사연"을 함께 보내줘 왠지 모를 뿌듯함을 안겨준다.
5.배송받는 시기, 배송받을 채소를 유동적으로, 편리하게 조절할 수 있다.
특히 나는 1번의 장점이 매우 크게 다가온다. 제철 채소를 매번 직접 찾아보고, 구매하고, 그에 맞춘 요리법을 찾아보는 것이 꽤나 번거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글리어스 구독 덕분에 제철의 채소를 편하게 받아볼 수 있게 되었고, 받은 채소를 퀘스트 깨듯이 다양한 요리로 변주하여 몽땅 먹으면 뿌듯함은 덤으로 따라온다. 아직 제철채소, 채소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사용하기 좋은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작년 가을에 가보고 반해서 시간이 될 때마다 가보려고 하는 마르쉐 시장이다. 농부, 요리사, 수공예가가 함께 만들어가는 시장이라고 한다. 토, 일, 월 중에 주로 열리고 성수, 국립극장, 인사, 홍대 등 다양한 지역에서 열리니 인스타그램 공지를 자주 확인하는 것이 좋다.
'돈과 물건의 교환만 이루어지는 시장’ 대신 ‘사람, 관계, 대화가 있는 시장’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용하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이 작은 시장을 통해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부터 조금 더 즐거운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관계, 대화가 있는 시장을 지향하는 만큼 제철 채소를 들고 오신 농부분들, 채소를 이용한 빵, 잼, 요리를 가져오신 요리사분들과 다정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많이 오가는 시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평온한 시장의 분위기와, 허브 모종과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돌아다니는 주말 오전의 나른한 사람들, 그와 어우러지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들이 매번 행복한 기분을 주어 자주 찾고 싶어지는 곳이다. 채소농장, 농부농장 외에 가끔 다양한 커피를 만나볼 수 있는 커피장도 여시는데 큰 코엑스에서 열리는 카페 박람회보다 더 좋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장바구니, 텀블러, 다회용기 사용을 권장하고 쇼핑백과 포장지를 재활용할 수 있는 존도 있어 환경을 생각하는 장보기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어글리어스 구독을 베이스로 하고, 어글리어스로 구할 수 없었던 봄채소나 허브, 쨈이나 빵 등은 미리 메모해 두었다가 마르쉐에 가서 사면 좋다. 내가 구매하는 상품이 어디서 어떻게 왔고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이 재배하고 만들어냈는지를 마주하는 일은 하루 만에 문 앞에 도착하는 배송보다 몇 배는 더 즐겁다.
바질, 딜, 고수 등의 허브류는 햇빛이 잘 드는 집이라면 겨울을 제외하곤 잘 자라기 때문에 직접 채소를 기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화분에서 채소를 직접 따고 바로 요리해 먹는 경험은 꽤 큰 뿌듯함을 안겨준다. 꼭 바로 먹을 수 없더라도 식물을 곁에 두고 보살피다 보면 무언가를 재배해 내는 농부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책 'atomic habit'에서는 습관을 만들고 싶다면 그 습관에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결합시켜서 그 시간을 즐겁고 만족스럽도록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나는 요리와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결합시켜 요리하는 시간을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팟캐스트는 오디오 콘텐츠인 만큼 한 곳에 붙들려 소비하기보다는 이런저런 다른 일을 하는 동시에 소비하는 형식이 더 알맞다.
가만히 앉아서 팟캐스트만 멍하니 듣는 것은 왠지 시간이 조금 아깝게 느껴져서, 나는 집안일을 하는 시간에 맞춰 듣기 위해 듣고 싶은 팟캐스트를 아껴둔다. 다만, 설거지는 물소리가 시끄럽고 빨래 개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아서 요리를 하고 식사를 하는 시간 통으로 팟캐스트 한 편을 듣는 게 딱 알맞다.
주로 듣는 팟캐스트는 김혜리의 필름클럽, 조용한 생활, 책읽아웃, 듣똑라, 아침 캐스트 등이다. 독립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오디오 콘텐츠를 듣는 시간이 많아져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 오디오 매거진은 유료 구독하고 있다. (김혜리 기자님 목소리 짱 사랑해요..!) 정희진 선생님께서 런칭하신 '정희진의 공부'도 몇 번 재밌게 들었었고, 지난 팟캐스트인 이동진의 빨간 책방, 지난 라디오인 이동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을 듣기도 한다.
요리보다 귀찮은 게 설거지와 쓰레기 처리다. 설거지는 어떻게든 해도 쓰레기 처리가 너무 힘든 난관이었다. 쓰레기 처리하기 싫어서 요리가 하기 싫을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산 5리터짜리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1인 가구에게 은근히 컸다. 1인 가구는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봉투 안에 쓰레기가 들어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게 되고, 쓰레기통을 열 때마다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1리터 음식물 쓰레기봉투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매우 기뻤다! 1리터 봉투는 매우 작아서, 1인가구가 적으면 1번, 많아도 2~3번 정도 요리를 하고 나면 차는 정도의 분량이다. 채소 자투리 정도의 쓰레기만 나오는 나에겐, 쓰레기봉투가 힘들어지기 전에 금방 채워 버릴 수 있는 1리터 봉투의 존재가 도움이 됐다.
1인 가구의 요리고민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식재료의 양이 너무 많아 버리게 된다는 말이었다. 점심은 회사 근처에서 사 먹고, 저녁에도 약속이 많기 때문에 1주일에 요리해 먹는 시간이 적다면 사둔 채소가 많게 느껴진다.
점심에 약속이 없는 날은 도시락을 싸다니는 것이 식재료를 빠르게 소진할 수 있는 방법이 되어준다. 처음에는 단순히 식비를 절약하려고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요리도 더 자주 할 수 있고 사둔 채소를 낭비 없이 모두 소비할 수 있고, 건강도 챙기고, 식비도 줄이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도시락을 싸 오는 동료들과 레시피를 공유하는 즐거운 점심시간, 혼자 조용히 팟캐스트를 들으며 여유를 즐기는 점심시간은 덤이다. 더 좋은 방법들을 발견해서 앞으로도 각 계절의 채소들을 온전히 누리는 채소 생활을 지속해 나갈 수 있기를, 배달음식과 무기력의 굴레에 다시 빠지지 않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