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의 단상
언젠가부터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예전보다 우울해진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고 벗어나지 못하는 계층에 대한 일관된 주제가 우울해서 일수도 있다. 이번 책 『바깥은 여름』에서는 계층 자체에 대한 시각보다는 내 아래에 또 다른 계층을 만들어내려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불편했다.
「입동」 속 아내는 처음으로 집을 보러 왔을 때 ‘징그러운 튤립 송이가 박힌 한참 전에 유행한 꽃무늬 벽지’에 대해 신랄하게 평한다. 그리고는 ‘내가 이 집 주인이라면 단순하고 산뜻한 벽지를 발랐을 거’라고 남편에게 속삭인다. ‘우리 집도 정신없다’는 남편의 반박에 ‘우리에겐 애가 있고 우리 집은 좁아서’라고 항변하며 집주인의 감각과 무신경함을 폄하한다.
아내가 고른 벽지의 취향과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감각은 집의 크기를 확장 시키거나 한 가족의 사회적 위치를 상승시킬 수 없다. 아내의 비난은 자신의 취향을 따라오지 못하는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자신의 위치는 상승시키고 싶어하는 욕심이다. 내 아래에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얄팍한 우월감이다. 자신이 중산층에 속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그 아래에 존재하는 누군가와 자신을 구별하려는 노력이다.
노량진에는 고시 공부만 하러 가봤던 이수와 도화가 회를 먹기 위해 찾은 노량진 수산 시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건너편」도 비슷하다. ‘자신의 한 달 생활비인 적도 있던’ 이십오만원짜리 줄돔값을 치르는 이수의 손끝엔 ‘죄책감과 설렘’이 드러난다. 불편한 마음으로 먹기 시작한 회를 보며 이수는 ‘생와사비이면 더 좋았을 텐데. 이십오만원짜리 회라면 의당 그래야 하지 않나’라는 아쉽고 섭섭한 마음을 갖는다. 이십오만원짜리 식사에는 그에 걸맞는 양념과 부수적인 요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수의 마음에는 예전보다 조금 나아진 자신의 고급스런 상황을 받쳐주지 못하는 주변 환경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자신의 비싸게 지불한 소비가 대접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갔으니 응당 거기에 맞는 대우를 바라는 모습에서 이미 촘촘한 계층의 사다리를 또다시 구분하려 애쓰고 있는 이수의 모습이 보인다.
고급스러운 식사에 어울리는 소소한 양념까지 마음 쓰는 이수지만 아직 많이 남아 있는 회가 아까워 ‘진작 배가 찼지만 남은 살점을 꾸역꾸역 위 속에 밀어넣’는다. 그리고도 모자라 ‘이 비싼 걸 매운탕에 넣을 수는 없’다며 도화에게까지 억지로 먹으라고 권한다. 이런 이수의태도는 오히려 고급 식사에 어울리지 않아 불편하다. 스스로 잘게 나누어 놓은 계층 사이에 이수가 끼어 버린 것 같아 안쓰럽다.
남들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혼자만 과도하게 신경 쓰는 내가 속한 계층의 우월감을 주장하는 이야기는 「가리는 손」에서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라는 딱지가 붙은 재이를 위로하는 엄마의 처방은 ‘너희 아빤 여기 일하러 온 것이 아니라 공부하러 온 사람이다’라고 아빠의 동향 사람들과 아빠를 차별화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엄마가 덧붙이는 한마디는 ‘고향 집에 하인도 있었대’이다. 고향에서 재이의 아빠가 속했을 사회적 계층을 이렇게 단 한마디로 정의 내린다. 과연 이 위로가 재이에게 유효했을지는 의문이다.
재이의 생일상을 차리며 엄마가 생각하는 자신의 부모 세대와 ‘반 발짝 다르게 사는 방법’은 ‘포장 김을 뜯어 접시에 올리는’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음식을 플라스틱 용기가 아닌 접시에 담으려는’ 노력은 그동안 치러 온 노동의 대가로 여유로워진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플라스틱 용기에서 접시로 옮겨졌어도 여전히 인스턴트 포장 김이라는 내용물은 변하지 않는다. 알맹이는 똑같고 주변만 변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조금은 나아졌다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엄마의 모습이 처연하고 가여워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적 계층 어딘가에 속해 있다. 내 위로 더 많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아래에 더 많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아래 누군가를 두기 위해 하는 노력만큼이나 비참해 보이는 것도 없다. 그래봐야 저 위 피라미드 정점에 서 있는 누군가의 시선에 우리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자꾸만 내려다보려는 우리의 은밀한 욕구를 일상에서 찾아내어 덤덤한 시선으로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우리 스스로 발견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발 아래에 또 하나의 세부적인 계층을 만들거나 자신이 서 있는 곳 위로 약간 높은 곳에 한 발을 올려 놓는다. 그리고 안도한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위치의 나도 누군가의 위이거나 아래일 뿐이다. 내 위와 아래에 존재하는 누군가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려봐야 기분만 상할 뿐이다. 아무리 내 위치를 올리려 노력해도 내 위층엔 여전히 누군가 존재한다.
지금 내가 어느 층에 속해 있든 비교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다. 지금 내 위치의 절대값은 변하지 않는다. 비교는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시작점이다. 작가는 위와 아래가 아닌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길 바란다. 아내와 함께 도배하는 남편이 있고 외로운 찬성이 옆에 에반이 있듯이 말이다. 시선을 상하에서 좌우로 돌린다면 초라한 비교가 아닌 따뜻한 위안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