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여담(飮食餘談) 5 - 아내와 두릅
두릅을 보면 이제 완연한 봄이구나 싶다. 그러면서 나직이 되뇌기도 한다. 봄이 왔구나, 장하다. 재래시장 좌판에 가지런히 놓여 제법 기운차게 뻗은 두릅의 싹을 보면 저것들이 겨우내 움츠려있다 저렇게 솟았구나 싶어 괜스레 장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은 두릅 파는 가게 앞을 쉬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데친 두릅을 초장에 찍고 있다. 쌉쌀한 맛이 입안에 도는 것 같아 침을 꿀꺽 삼키기도 한다. 이맘때 두릅을 앞에 두고 서성이는 발걸음은 이미 봄나들이 같다.
두릅은 싱그럽게 입맛 돋우는 봄 제철 음식 중 제일 앞줄에 선다. 그런데 봄기운을 흠뻑 느끼고 싶어 두릅을 사려고 보면 팔고 있는 것들이 조금씩 다르다. 참두릅, 땅두릅에 개두릅까지 있다. 자칫 엉뚱한 것을 사면 이 봄기운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앞선다. 참, 땅, 개. 저마다 다른 수식어를 앞에 붙인 이 두릅들은 뭐가 다를까.
두릅은 두릅나무에 달리는 새순을 말한다. 두릅나무 중 독활이라는 나무의 어린 순은 땅에서 난다. 이게 땅두릅이다. 이와 구분하기 위해 나무에서 나는 순은 참두릅이라고 부른다. 개두릅은 엄나무의 순이다. 세 가지 두릅에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각자 좋아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공통된 맛은 쌉쌀함이다. 봄의 기운을 북돋는 쌉쌀함. 인생은 쓰다고 하지만 두릅만 같다면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활력, 봄철 춘곤증도 싹 가시게 한다.
두릅은 주로 회로 먹는다. 회라고 해서 날로 먹는 것이 아니다. 데친 두릅을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것이다. 이렇게 먹는 두릅회는 막걸리와 궁합이 잘 맞는다. 치킨에 맥주 못지않는다. 줄여서 '두막'이라고 불러볼까. 흔한 두부에 막걸리가 아닌, 이 봄의 '두막'은 두릅에 막걸리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마신 뒤 잘 데쳐 연한 두릅을 초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는다. 씹으면 두릅의 싱그러운 쓴맛과 초고추장의 새콤한 맛에 막걸리의 취기가 어우러진다. 봄의 정취, 그 한입에 두릅이 왜 '산채의 제왕'인지 알 수 있다.
느긋한 주말 오후, 하늘은 파랗고 볕마저 따사로운, 그래서 누구나 눈 지그시 감고 고개 주억거리는 완벽한 봄날이라면 '두막'은 더 빛을 발한다. 두릅 입에 넣고 씹다 막걸리 한잔 호방하게 털어 넣으면 두릅의 쌉쌀함과 초장의 새콤함에 막걸리의 적당한 산미가 섞인다. 가늠할 새도 없이 혀 위로 쏟아지는 봄기운이 느껴진다.
그렇게 두릅이 준 봄의 맛이 또렷하게 기억에 아로새겨진 날이 있었다. 싱싱한 참두릅이 있었고, 정읍에서 공수한 막걸리가 있었다. 무르지 않게 두릅을 살짝 데쳤고 초장은 따로 만들었다. 피부에 와 닿는 봄기운 보태기 위해 마당에 나가 소박한 돗자리를 깔았다. 그리고 봄기운 흠뻑 담은 음식에 취해, 크게 웃었다.
그날 봄에 취한 아내의 얼굴, 그 해사하게 웃던 모습은 매년 봄이 오면 생각나는 장면이 됐다. 백설희는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라고 노래했지만 매년 봄은 오고 그 봄날의 느낌은 언제까지나 선연할 것만 같다. 봄이 오면 코끝에 스치는 두릅의 독특한 향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 향과 함께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은 말한다. 지금, 스트레스에 지친 아내를 위해 두릅과 막걸리를 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