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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양 Sep 11. 2024

운명과 인과

오늘의 에필로그

24년 9월 10일

오늘의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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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나는 운명이라는 말이 참 싫다.

아니 나는 운명을 부정한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하던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집행되는 운명은 있을 수 없다.

아니 그러한 운명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나의 삶이 어떠한 발버둥을 치더라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한다면, 삶을 살아갈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다.


혹자는, 운명이 정해져 있더라도 그 운명까지 어떻게 도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그럴듯한 포장일뿐이다.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운명이 실패로 결정지어져 있다면, 그 여정에 의미를 부여할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아무런 노력이 없더라도 나의 운명이 성공으로 결정지어져 있다면, 나는 그 여정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과정을 가꾸어 나갈 의지를 가질 수가 없다.



내가 믿는 것은 인과이다. 

정해진 것은 운명이 아니라 인과다.


절대적으로 집행되는 운명처럼 보이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운명이 이루어지도록 만든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즉, 그 운명은 그저 '결과'일뿐이며 그 결과를 맺어낸 '원인'이 존재한다.

운명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인과일 뿐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인과는 정해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원인에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지는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운동을 한다'라는 '원인' 뒤에는 '건강이 좋아진다'는 '결과'가 찾아온다.

'성실히 주어진 일을 한다'라는 '원인' 뒤에는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는 '결과'가 따라온다.


누군가는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똑같이 열심히 운동을 헀지만 누군가는 오히려 관절이 나빠져서 통증을 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인과일 뿐이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원인'이 존재할 뿐이다. '잘못된 자세로 운동을 했다'라는 원인 말이다.


인과는 독립적이지 않다. 

인과는 거미줄처럼 얽혀있으며 그 세밀한 인과를 모두 알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같은 노력을 해도 다른 결과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여 그것이 곧 운명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결과는 내가 살아온 모든 걸음으로부터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인과는 단방향이 아니다.

때로는 결과가 또 다른 원인이 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결과가 원인보다 선행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원인으로 인해 그 사람에게 자꾸 연락을 하게 된다는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과처럼 보이지만, 원인을 스스로 알지 못한 채 결과를 먼저 인지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생겨날 수도 있다. 


인과는 통제불능이 아니다.

인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미리 알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나의 인과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때때로 결과를 고정함으로써 원인이 강제적으로 실행되는 경험을 한다. 


반드시 성공한다는 결과를 확신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 성공이 주어진 운명처럼 나에게 저절로 굴러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성공한다는 결과를 이루기 위한 원인을 나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 인과를 성립시킬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정해진 결과에 맞는 원인을 만들어낸다. 자신에 대한 강한 확신은 그런 식으로 생겨난다. 




나의 삶에 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나만의 인과를 만들어 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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