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운전자가 차를 모시고 다니는 방법
등 뒤로 뻑하는 소리가 들렸고 머릿속에는 비슷한 발음의 비속어가 떠올랐다. SUV가 뒤차를 박았는데 문제는 SUV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나였다.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앞으로, 앞으로 빼야지,라고 숨 넘어가듯 말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드라이브에 기어를 놓고 차를 빼야 한다는 걸. 그것 말고 이런 점들도 알고 있었다. 급히 빌리게 된 큰 차는 아직 익숙하지 않고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은 탓에 긴장했으며, 5시간의 장거리 운전 후 집중력이 떨어져 있으니 뒤에 주차된 흰 차를 조심하면서 후진해야 한다는 걸. 너무 지쳐 후방 센서의 경고음이 듣지 못했을 뿐이었다. 다행히 내 또래의 딸이 있는 인상 좋은 차주는 적절한 선에서 합의해주었으나 이 사건으로 운전자로서의 자신감이 잔뜩 쪼그라들었다. 어쩌자고 나는 한 달 동안의 로드트립을 계획했던가. 이것은 그 장대한 로드트립의 첫 번째 날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로는 차를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모시고 다녔다. 차를 모시고 다니는 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자차로 다니는 여행이 심드렁해졌다면 꼭 시도해보시길). 이를테면 가고 싶은 관광지가 아닌 주차 공간이 여유로운가의 여부에 따라 관광지를 선정하므로 새로운 취향을 발굴할 수 있다. 게다가 한 번 주차를 하면 최대한 차를 옮기지 않는 선에서 그 주변의 명소를 샅샅들이 발로 누빌 수 있다. 주차비도 아끼고 걷기 운동도 할 수 있으니 1석2조다. 통영 지도를 펼쳐보고 충렬사, 박경리 생가, 서피랑과 삼도수군 통제영을 이어 보라. 덕분에 만보기 앱에는 매일 같이 ‘오늘의 목표 걸음 수를 채웠습니다!’하는 팡파르가 터졌다. 해만 지지 않았다면 통영시립박물관을 따라 윤이상 기념공원까지 들려 숙소로 걸어왔을 것이다.
밤눈이 어두우니 해가 지기 전에는 숙소로 차를 뫼시고 돌아와야 했다. 자연스레 저녁 식사 시간도 앞당겨졌다. 9시면 곯아떨어지고 새벽 6시면 절로 눈이 떠지니 지난 6개월 간 실패했던 미라클 모닝을 맞이했다. 다행히 통영의 밤바다는 걸어서도 보고 올 수 있었다. 새벽에는 관광지로 향하는 차량이 많지 않아 선선한 바람을 쐬며 드라이브 하기에 딱 좋았다. 덕분에 다른 여행객들이 곤히 자고 있을 시간에 신선대에서 일출을 보고 아무도 없는 학동 흑진주 몽돌해변도 눈에 담았다. 여기서 드라이브는 말 그대로 운전이라는 뜻이라서 매 순간 그 풍경에 찬탄하게 된다는 여차 홍포 전망대 드라이브 코스는 애초에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아쉽긴 하지만 안전제일, 앞 똑바로 보고 운전에 집중해서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는가.
차를 모시고 다니면 과하게 움직이다 몸살 걸릴 일도 없다. 적절히 내리는 비가 쉬는 날도 정해주기 때문이다. 궂은날이면 밖으로 나가 고생하는 대신 포근한 담요를 덮고 가져온 책을 읽으면 되니 장기간 여행에도 지치지 않을 수 있다. 이전엔 새로운 동네에 가면 독립서점과 동네서점에서 새 책 사 나르기에 바빠 가져 간 책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내가 모시는 차는 가져간 책을 읽을 시간도 만들어주니 이 얼마나 균형 잡힌 여행인지. 대신 폭우 속 운전은 좀 무서웠다. 숙소를 옮기기로 한 날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는데 앞창에 화살처럼 내리 꽂히는 빗줄기에 고속도로의 차들이 일제히 비상등을 켜고 40km/h로 빌빌 기었다. 3시간 거리의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동안 하늘과 눈치게임을 하느라 진이 빠졌다. 고속도로에서 사고 난 차를 보고 5시간 만에 겨우 숙소에 도착한 후에는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됐다. 장엄한 자연 속이 아니더라도 자연 앞에 겸허해졌다.
분노의 질주를 보며 상상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나는 여전히 초보 운전자다. 도로에선 한없는 아량으로 뒷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주차장에서는 입구와 제일 먼 땡볕에서 혼자 줄을 맞춰보려 노력한다. 비경이라는 산꼭대기의 암자에는 친구의 도움을 빌려야 가볼 수 있고, 해 질 녘 해안데크를 걷고 나서는 멀쩡한 내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래도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모습으로 달린다. 겁먹고 포기하는 대신 길을 더 꼼꼼히 살피고 출발 전 도착지의 주차장을 미리 확인하면서 미숙하나마 내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떠나본다. 그동안 익숙한 것, 구미에 맞는 벽돌만 골라 다른 것들이 나의 세계에 침범할 수 없게 단단하게 쌓아 올린 벽이 초보운전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한 안도감과 쾌감이 느껴진다. 세상에는 아직 내가 해 보지 않은 것들, 내가 잘할 줄 모르는 것이 많다. 그리하여 펼쳐질 새로운 세계도 남아있다.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 초행길이니까 언제든 다시 경로를 탐색하면 된다. 길은 이어져있고, 언제 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