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회 후기-준비 편
연구실에 들어오고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지도 교수님의 적날한 차별이었다. 정년을 고작 4년 남긴 원로 교수이고 학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만큼 모든 것을 당신 입맛대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실에 배정받자마자 교수님은 동기들 중에 두 명을 콕 집어서 밀어줄 것을 티를 냈다. 나는 처음부터 국제 학회를 목표로 이 연구실에 들어와 학회 발표를 고려한다는 연구 주제를 골랐고 개강 전부터 실험을 시작했었다. 그러나 교수님은 내가 아닌 다른 두 명에게 영국과 미국 학회에 가자 그랬고 그것은 나를 매우 자극했다. 인생 최대의 승부욕을 느끼며 연구를 하고 발표를 했었다. 그리고 내가 미국 학회 멤버로 선발되었을 때 주변 반응은 싸늘했다. '쟤가 왜 가는 거지' 하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더더욱 나를 견디기 힘들게 한 것은 교수님의 반응이었다. 포스터가 아닌 오랄 발표를 하기로 했을 때 교수님은 몇 번이고 걱정을 내비쳤다. 항상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말 할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었다. 교수님의 반응 때문인지 선배들도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억울했다. 내가 가게 된 미국 학회는 교수님이 처음부터 4학년을 데리고 가겠다고 선포했던 학회였다. 왜 내가 아닌 다른 동기들이 간다 할 때는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다가 내가 가게 되니까 이렇게나 말이 나오는가 말이다. 내가 유학생이어서? 내가 유년생이어서? 내가 여학생이어서? 어쩌면 최약체의 조건을 다 갖고 있는 나였다. 그래서 더 인정받고 싶었고 더욱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들에 몇 번이고 무너져 내릴 뻔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교수님 앞에서의 첫 발표였던 영론발표, 학회에서 발표할 내용을 공개하는 중간발표, 나의 영어 실력을 증명한 해외 연구진 초천 강연까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올라왔고 드디어 교수님에게 인정받았다. 그리고 선배들의 인정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연구실에 들어온 지 고작 7개월 만의 성과였다.
여기까지가 내 시점에서의 이야기이다. 주변 사람들의 '넌 안될 거야'라는 편견과 의심을 뚫고 결국 해내는 감동 스토리가 말이다. 하지만 미국 출국 직전에 알게 된 사실은 사뭇 달랐다.
출국을 이틀 앞둔 늦은 새벽, 대학원생실에서 R군과 나란히 앉아서 각자 작업을 했다. 출국 전 연구실 사람들 앞에서의 공식적인 발표 연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추가적으로 새새한 부분을 수정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작업하다 나는 R군에게 교수님의 편애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처음부터 4학년을 데리고 가겠다 한 학회를 내가 가게 되니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시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왜 그들은 되고 나는 안되지 라는 생각으로 힘들었지만 그것이 승부욕이 되어 지금의 결과물이 탄생하게 된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자 R군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마지못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교수님은 처음부터 4학년을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고 말이다. 학기 초, 교수님이 내 동기들을 데려가겠다고 얘기를 할 때, 선배들은 모두 알았다고 한다. 국제 학회 이야기는 단지 동기부여를 위한 미끼였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이 생각하기에 작년 4학년들이 의욕이 너무 없다고 생각하셨고, 이번 기수들은 더욱 열심히 했으면 하는 마음에 영국과 미국을 미끼로 연구에 열중시키겠다는 생각이었다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내가 교수님에게 실험 결과들을 보고하고 미국 학회 멤버로 선발되었을 때, 원래 가기로 했던 동기들은 갑작스럽게 실험기기 회사로부터 라이선스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참가가 불발됐었다. 교수님이 이런 중대한 사항을 몰랐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왜들 그렇게 나를 신기한 눈으로 보고 그렇게까지 걱정을 했는지 말이다.
애초에 물면 안 되는 미끼를 가지고 낚시를 하는 교수님의 낚싯줄을 덥석 잡아당긴 게 나였던 것이다. 애초에 4학년을 데려갈 생각이 없었는데 예상 못한 인물이 덥석 물고 놔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데려가겠다고 하고 왜 이렇게 불안해하였는지 납득이 갔다. 내가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나'를 못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오해였던 것이었다. 정말 속으로 욕 많이 했는데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때까지 마음고생한 것들이 억울해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오해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건 그거대로 뿌듯해졌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해낸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오히려 교수님에게 감사해졌다. 기회를 주셔서 말이다. 연구실에 들어오고 인생이 달라졌다. 가장 두려워하던 것을 극복했고 한계라 생각한 것을 뛰어넘었다. 더 이상 커질 것 같지 않던 내 세상이 끝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다. 그 넓은 세상 속에서 새로운 꿈이 꿈틀거리며 자라나고 있다. 기회를 주신 교수님에게 보답하는 것은 이번 발표를 무사히 마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지금 미국행 비행기 안이다. 이 비행기를 타기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며칠 있음 있을 발표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긴장되지만 무섭지는 않다. 설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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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드린 날짜에 맞추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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